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900551
한자 金湜
영어공식명칭 Kim Sik
이칭/별칭 노천(老泉),사서(沙西),동천(東泉),정우당(淨友堂),문의(文毅)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선촌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성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482년연표보기 - 김식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01년 - 김식 진사시 합격
활동 시기/일시 1519년 - 김식 현량과 장원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19년 - 김식 선산으로 유배
몰년 시기/일시 1520년연표보기 - 김식 사망
묘소|단소 김식 묘 - 경기도 남양주시 삼패동
사당|배향지 경현단 -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선촌리 산70 지도보기
성격 학자
성별
본관 청풍
대표 관직|경력 홍문관 직제학

[정의]

경기도 가평군에 있는 경현단에 배향된 조선 전기 학자.

[가계]

김식(金湜)[1482~1520]의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자는 노천(老泉)이고, 호는 사서(沙西)·동천(東泉)·정우당(淨友堂)이다. 시호는 문의(文毅)이다. 할아버지는 김질(金耋)이고, 아버지는 김숙필(金叔弼)이다. 어머니는 사천 목씨(泗川 睦氏)이다.

[활동 사항]

김식은 1501년(연산군 7)에 진사가 되었는데, 관직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후 중종반정으로 시대의 분위기가 변하자 광흥창(廣興倉) 주부(主簿)에 천거받아 나아갔고, 이어 형조 좌랑, 호조 좌랑, 사헌부 장령 등을 역임하였다. 1519년(중종 14) 4월에는 현량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급제 후 성균관 대사성과 홍문관 직제학에 올랐다. 1519년(중종 14) 11월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절도안치(絶島安置)[외딴 섬으로 유배 보내는 형벌]에 처해졌는데,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등의 비호로 선산(善山)[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으로 유배되었다. 하지만 다시 신사무옥에 연좌되어 절도로 이배된다는 소식을 듣고 자결하였다.

김식은 조광조와 학문적·인간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었으며, 정치적으로도 미신 타파, 향약 실시, 정국공신(靖國功臣) 위훈 삭제 등의 개혁 정치에 함께 하였다. 조광조·김정(金淨)·기준(奇遵) 등과 함께 ‘기묘팔현(己卯八賢)’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묘소]

김식의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삼패동에 있다.

[상훈과 추모]

김식은 기묘사화 후 직첩(職牒)[관직 임명장]이 환수되었다가 명종 때 신원되었다. 이어 선조 때 이조 참판을 거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661년(현종 2) 조광조와 함께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선촌리 장석마을에 있던 미원서원(迷原書院)[지금의 경현단]에 배향되었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3.09.05 내용 변경 [가계] 어머니는 사천 목씨(泗川 目氏)이다. → 어머니는 사천 목씨(泗川 睦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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