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조면 만세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300554
한자 加祚面萬歲運動
영어공식명칭 Gajomyeon Manse Undong
이칭/별칭 가조 3·1운동,가조 3·1만세운동,가조면 기미 독립 만세운동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심옥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단 시기/일시 1919년 3월 19일 - 가조면 만세운동 비밀 회합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3월 20일연표보기 - 가조면 만세운동 정오에 가조 장터 만학정 앞에 장꾼들 500여 명이 결집, 시장 중앙에서 태극기를 들고 만세 선창
종결 시기/일시 1919년 3월 22일연표보기 - 가조면 만세운동 가조·가북면 주민 3,000여 명이 만세 시위. 일본 헌병과 대치. 다수의 사상자 발생
발생|시작 장소 석강리 -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석강리 지도보기
종결 장소 거창 시장 -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중앙리 122-1 지도보기

[정의]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일대에서 1919년 3월 19일부터 22일까지 일어난 민족 독립운동.

[개설]

가조면 만세운동은 일본의 강제적인 식민지 정책으로부터 자주독립할 목적으로 일으킨 3·1운동의 전국적인 확산과 흐름을 같이한 독립운동이다. 1919년 3월 20일 가조면 장터를 시작으로 가조, 가북 지역 일대에서 전개되었다.

[역사적 배경]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 공원 육각정에서 시작된 3·1만세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서울을 중심으로 시작된 만세 시위는 점차 지방으로 확대되었다. 경상남도 지방은 3월 3일 부산과 마산에 독립 선언서가 전달되면서 만세운동이 본격화되었다. 경상남도 지방은 지역 유림이 주도하고 지역민이 참여했는데, 거창은 가조 장터 만세운동이 시작점이 되었다.

[경과]

가조면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9일 김호(金浩), 오문현(吳文鉉), 어명우(魚命佑), 이병홍(李秉洪), 김호(金濩), 신병희(愼炳禧), 김익동(金翼東), 김관묵(金寬黙) 등 지방 유지 50여 명이 가조면 석강리 정자나무에 집합하여 비밀회의를 가지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대표자로 선정된 5인[오문현, 어명철(魚命喆), 김호(金浩), 김채환(金采煥), 최영순(崔榮淳)]은 1919년 3월 22일 거창읍 장날에 만세 운동을 하기로 밀약함과 동시에 결의를 다졌다. 이 소식에 전해지자, 김병직(金秉直)[가북면 용산리]과 어명준(魚命俊)[가조면 동례리]은 1919년 3월 20일 가조 장날에 거사를 하기로 계획하고 비밀리에 동지들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1919년 3월 20일 정오 가조 장터에서 장꾼들 500여 명이 만학정 앞에 모인 가운데 시장 중앙에서는 태극기를 든 채 만세 선창이 시작되었다. 가조면 만세운동의 전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19년 3월 19일] 대표자 5인을 선정하고 3월 22일 거창 장날로 거사를 결정, 만세운동을 결의했다.

결의 내용

-대표자 선정, 5인의 책임 대표 선출

-1919년 3월 22일 거창 장날 만세운동 거행 및 일본 헌병 분대 습격

-1919년 3월 21일 야간 이용 본 면내 각 마을에 전달, 기일에 일제 동원

-1919년 3월 22일 오전 11시까지 만학정 정자나무 밑에 집합

-본 면내 사람으로 불참자는 엄중 문책할 것

대표자 명단

-오문현, 어명철, 김호, 김채환, 최영순[5인], 신병희[일본 헌병의 심문에 스스로 대표라고 주장]

[1919년 3월 20일] 가조 장날 정오에 만학정 앞에서 지역민과 장꾼들이 만세 시위를 했다.

[1919년 3월 22일] 아침에 거창 헌병 분대 일본 헌병이 가조면 장기리로 와서 주동 인물들을 끌고 가서 취조했다. 오후 2시 30분에 가조면·가북면 주민 3,000여 명이 만세 시위를 하자 해산 명령을 내려졌다. 시위 행렬이 거세지자, 거창 헌병 분대와 용산 헌병 주재소의 헌병이 합세하여 지역민과 대치했다. 대치 과정에서 일본 헌병이 총격을 가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많은 사람들이 현장에서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 체포된 사람들은 갖은 고문은 물론 태형을 당했는데, 대상자가 수백 명에 달했다.

[결과]

가조면 만세운동 과정에서는 순국 5명[신문구, 배영환, 조이록, 이석종, 허경두], 부상자 4명[최학서, 최상선, 이점준, 문철주], 수형자 8명[김병직 3년, 어명준 1년, 김관묵 1년 6개월, 어명철 1년, 김익동 3년, 김호 1년, 이병홍 1년, 강두몽 1년], 핵심 참여 인물 4명[오문현, 어명우, 김채환, 최영순]을 포함하여 지역민 100여 명이 체포되었다. 1919년 3월 22일 거창 장날 만세운동에 참여한 가조면가북면 주민들은 3,000여 명에 달했고, 거창읍을 향하는 행렬은 위협적이었다. 이에 일본 헌병은 시위 행렬을 저지하기 위해 총격을 가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또한 만세 시위와 진압 과정에서 지역민과 일본 헌병의 대치는 매우 격렬했다. 가조·가북 3·1 운동 당시 독립운동가의 활동에 대해 정부는 공적을 인정하여 독립 유공자로 포상을 했다. 독립 유공자는 신문구, 조이록, 이석종, 배영환, 허경두, 김익종, 김관묵, 어명준, 어명철, 김병직, 최영순 등 11명이며, 현재 거창 충의사에서 거창 3·1 정신 계승 발전 위원회 주관으로 독립지사를 추모하는 행사가 매년 3월 1일 진행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가조면 만세운동은 거창 지역민에 의해 자발적으로 전개된 항일 저항 운동이며, 동시에 전국적으로 전개된 3·1 운동과 흐름을 같이 하고 있다. 초기 만세운동의 주도 세력은 지역 유림이었으나 시위 진행 과정에서 지역민이 거국적으로 참여하면서 저항의 동력이 되었다. 당시 만세운동의 전개 양상을 살펴보면, 만세운동이 지역 내에서도 상호 연동되고 연계되는 양상을 띠고 있었고, 만세 시위 과정에서 격렬한 대치와 저항이 발생했다. 지역민의 적극적인 참여로 독립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피력했다는 점에서는 지역성을 반영하고 있지만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에 대한 평가는 한계가 있다. 국가적 차원에서 독립 유공자 인정은 순국자, 수형자 위주로 서훈을 받았기 때문에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대표자 중 다수는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 가조면 만세운동은 지역민의 결집된 독립 의지를 보여 준 대표적인 지역 항일 운동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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