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05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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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搜勝臺 所有權 紛爭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황산1길 199[황산리 425]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배병욱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543년 - 퇴계 이황 수승대 명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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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단 시기/일시 | 1919년 - 토지 조사 사업 시 수승대가 국가 하천에 편입된 것을 확인하고 거창 신씨와 은진 임씨 문중 간 소유권 분쟁 재발 |
전개 시기/일시 | 1927년 3월 - 거창 신씨와 은진 임씨 문중이 경상남도에 하천 부지 점용 허가원 제출 |
전개 시기/일시 | 1928년 - 은진 임씨가 수승대 소유권 확인 청구 소송 제기 |
종결 시기/일시 | 1931년 3월 - 은진 임씨의 수승대 소유권 확인 청구 소송 기각 |
발생|시작 장소 | 수승대 -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425 |
종결 장소 | 부산 지방 법원 진주 지청 - 경상남도 진주시 |
성격 | 사건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수승대의 소유권을 둘러싼 거창 신씨와 은진 임씨 문중 간 분쟁.
[개설]
수승대(搜勝臺)는 조선 중종 때 요수(樂水) 신권(愼權)이 은거하며 강학하던 곳이다. 이황이 그 이름을 고쳐 준 이래 이황·신권·임훈의 시가 나란히 새겨져 탐승객에게 화제가 되었다. 이에 거창 신씨와 은진 임씨 간 수승대를 둘러싼 소유권 분쟁이 일어나, 한 차례 안의 현감이 거창 신씨의 소유권을 확인해 주었음에도 갈등이 해결되지 않고 일제 강점기까지 이어졌다. 거창 신씨의 실수로 수승대가 국가 하천에 편입되자 1920년대 양 문중 간 소유권 분쟁이 재발하였는데, 1931년 법원은 거창 신씨의 소유권을 재확인해 주었다.
[역사적 배경]
명승 제53호 수승대는 거창의 대표적 관광지로, 삼국 시대에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던 이곳에서 사신을 근심스러운 마음으로 보내었다 하여 ‘수송대(愁送臺)’라고 불리었다. 조선 중종 때 신권이 이곳의 거북 바위를 ‘암구대(岩龜臺)’라 부르고 그 곁에 요수정(樂水亭)과 구연재(龜淵齋)를 지어 자연을 벗하며 제자를 길렀다. 1543년(중종 38)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이 고을을 지나다가 ‘수승대(搜勝臺)’라는 이름을 새로 붙여 주면서 한 수의 시를 남겼다. 이에 화답한 신권과 신권의 처남 갈천(葛川) 임훈(林薰)의 시가 함께 거북바위에 새겨져 있다. 그러나 이들의 시가 탐승객 사이에 화제가 되자, 신권과 임훈의 후손인 거창 신씨와 은진 임씨 문중은 서로 수승대의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다툼이 생겼다. 임씨 문중이 "갈천 선생이 지팡이 짚고 나막신 끌고 노닐던 곳[葛川杖屨之所]"이라는 명문을 근거로 대자, 신씨 문중은 "요수 선생이 몸을 감추고 마음을 닦은 곳[樂水愼先生藏修洞]"이라는 글을 새겨 대응하였다. 16세기 중엽 다툼이 시작된 이래 1866년 안의 현감이 한 차례 신씨의 손을 들어주었으나, 두 문중의 분쟁은 목숨을 버리고 재산을 탕진하면서도 구한말까지 그치지 않았다.
[경과]
일제 강점기에 들어 신씨 문중은 산림법에 따라 지적부를 제출하였고, 1914년 부동산 증명서를 받았다. 그러나 토지 조사 사업 때에는 임야이니 신고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소유자 신고를 하지 않은 까닭에 수승대는 하천으로 사정되어 국유지에 편입되고 말았다. 이에 1919년 임야 조사 때 문제가 불거져, 양 문중 간 분쟁이 재발되었다.
1927년 3월 두 문중은 수승대의 소유권을 얻기 위해 경상남도에 하천 부지 점용 허가원을 제출하였고, 12월에는 도에서 실지 조사까지 벌였다. 1928년에는 양여 신청서를 제출하고 도와 총독부를 상대로 맹렬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임씨 문중은 법원에 수승대 소유권을 주장하는 소송을 제기하였다.
[결과]
1929년 4월 2일 부산 지방 법원 진주 지청에서 수승대 소유권에 대한 첫 재판이 열렸다. 2년 후인 1931년 3월 판결이 내려졌는데, 결국 임씨 문중이 제기한 수승대 소유권 확인 청구 소송이 증거 불충분으로 기각됨으로써 신씨 문중이 수승대를 관리하게 되었다. 이로써 400년에 걸친 수승대 소유권 분쟁은 일단락되었다.
[의의와 평가]
조선 시대 이래 400년을 이어온 수승대 소유권 분쟁은 거창 지역의 뿌리 깊은 문중 의식이 부정적으로 발현된 사건이다. 이 분쟁이 일제 강점기까지 이어졌다는 것은 당시 지역 사회가 여전히 문중 중심의 사회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거창의 지역성은 물론, 지역 사회의 근대적 변화의 정도를 알 수 있는 지표로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