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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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韓國育英事業-朝鮮朝-宮中女流詩人崔松雪堂 |
영어의미역 | Choe Songseoldang, the Mother of Korean Educational Work and the Last Female Court Poet of the Joseon Dynasty |
이칭/별칭 | 고보 할매,고보 할머니,고보 할마이,고부 할매,영친왕 보모 |
분야 | 문화·교육/교육,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김창겸 |
출생 | 1855년 8월 2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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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 1896년 |
활동 | 1897년 |
활동 | 1907년 12월 5일 |
활동 | 1908년 1월 |
활동 | 1912년 9월 |
활동 | 1912년 8월 |
활동 | 1922년 |
활동 | 1930년 2월 |
활동 | 1931년 2월 5일 |
추모 | 1935년 11월 30일 |
추모 | 1963년 8월 15일 |
몰년 | 1939년 6월 16일 |
출생지 | 경상북도 김천시 문당동 |
거주|이주지 | 서울특별시 적선동 |
묘소|단소 | 경상북도 김천시 부곡동 777 |
성격 | 교육가 |
성별 | 여 |
[개설]
『동아일보』 1931년 4월 25일자에는 최송설당과 김천의 만남을 “적막(寂寞)의 김천을 활기(活氣)의 김천으로, 초야(草野)의 김천을 이상(理想)의 김천으로”라고 하였다. 또 『동아일보』 1939년 8월 17일자에는 최송설당의 “유업(遺業)은 천추(千秋)에 그 빛을 남길 것이고, 공덕(功德)과 방명(芳名)은 학교[김천고등보통학교, 현 김천중학교·김천고등학교]의 운명과 아울러 이 세상 끝까지 영원히 비칠지니”라고 평가하였다.
한말과 국권 상실기에 걸쳐 한국 육영 사업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고 간 최송설당! 그녀의 본 이름은 알 수가 없고, 1912년에 처음 작성된 호적에도 ‘최송설당(崔松雪堂)’이라고 적혀 있다. 송설당이란 이름은 고종 황제가 지어준 것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최송설당의 생애는 전근대에서 근대로 나아가는 역사적 전환기이면서도,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라는 질곡 속을 거치는 과정과 겹쳤다. 근대화 과정에서 여성이 극복해야 하는 보편적 과제와 몰락한 집안의 후손이 풀어야 할 특수한 과제를 갖고 있었다. 또한 이 두 가지는 전통 시대의 굴레이기도 하였다. 그녀가 이룩한 김천고등보통학교 설립은 자신이나 가문만의 과제가 아니라, 김천 지역의 숙원 사업을 풀어낸 역사적 행보이자 민족 교육사적인 의미를 가지며, 한편 문학 작품은 조선조 마지막 여류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몰락한 가문의 후손으로 김천에서 태어나다]
송설당의 본관은 화순(和順)이며, 1855년(철종 6) 8월 29일 김산군 군내면 문산리[현 김천시 문당동]에서 아버지 최창환(崔昌煥)[1827~1886]과 어머니 정옥경(鄭玉瓊) 사이에 세 딸 중 장녀로 태어났다.
송설당의 집안과 김천이 인연을 맺은 계기는 1811년(순조 11) 평안도에서 터진 홍경래(洪景來)의 난이었다. 증조부 최봉관(崔鳳寬)은 이 반란을 진압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런데 최봉관의 외가 강릉 유씨(江陵劉氏)가 오히려 난군에 가담하였고, 더구나 최봉관 자신 또한 평안도 선천군이 반군에 의해 함락될 때 이에 항전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옥사하였고, 그의 맏아들 최상문(崔翔文)을 비롯한 4형제는 전라도 고부(古阜)로 유배되었다. 그리하여 역적의 집안으로 몰락해 버린 것이다. 최상문의 아들인 최창환, 즉 송설당의 아버지는 고부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다. 이러한 연유로 뒷날 김천 지역에서 송설당이 ‘고부 할매’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최창환은 아버지 최상문이 1847년에 사망하자, 고부에서 김천으로 이주하였다.
송설당이 김천에 거주한 시기는 전후 두 차례로 나뉜다. 첫 시기는 1855년에 태어나서 1894년(고종 31)에 상경하기까지 약 40년 정도이다. 이후 서울에 정착하고서 1930년까지 김천을 오가며 30여 년을 지냈다. 그리고 김천으로 돌아와 1930년 이후 1939년 사망할 때까지 10년 정도 김천에서 살았다. 그러므로 송설당의 삶은 서울로 상경하기 이전 김천 시절과 서울 체류기 및 김천 귀향기로 나뉘며, 84년의 일생 가운데 전반부 40년과 마지막 10년 등 모두 50년 정도를 김천에서 보낸 셈이다.
[서울로 올라가 입궁하여 영친왕의 보모가 되다]
송설당은 김천에서 아버지로부터 한학과 한글을 배웠다. 아버지가 사망한 이후에는 삯바느질과 농사, 장사 등 여러 방면으로 천신만고를 하여서 재산을 모아 나갔다. 송설당의 일생에서 최대 승부수는 바로 서울행이었다. 송설당은 동학란(東學亂)에 살 수가 없어 난을 피해 1896년(고종 33) 무렵에 상경하여 서울 적선동(積善洞)에 자리 잡았다. 상경한 뒤 송설당은 오직 홍경래의 난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희생된 조상의 신원(伸寃) 문제 해결에 몰두하였다. 그래서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1897년 2월에 경운궁(慶運宮)[현 덕수궁]으로 옮길 무렵에 송설당은 엄상궁의 친동생과 친교 관계를 맺었다.
송설당의 삶을 완전히 바꿔 놓은 일대 사건은 ‘영친왕 보모’가 된 사실이다. 그래서 송설당을 연상하면 단연 ‘영친왕 보모’가 떠오른다. 영친왕은 1897년 10월 20일에 덕수궁에서 태어났다. 송설당은 이 시기에 궁에 들어갔다.
송설당이 서울에 있는 봉원사(奉元寺)에 드나들며 엄상궁의 여동생과 가까웠는데, 엄상궁의 회임(懷妊)[임신] 소식을 들은 송설당이 왕자를 점지해 달라고 백일기도를 올렸고 왕자 출생을 현몽하였으며, 이러한 그녀의 정성이 엄상궁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게다가 출산 예정일이 다가옴에 산후 용품을 최고급으로 준비해 두었다가, 영친왕이 태어나자마자 엄상궁에게 바쳐서 이를 높게 평가받았고, 마침내 송설당은 궁으로 입궐하여 영친왕 이은(李垠)의 보모가 되었다.
그러나 1907년 6월에 헤이그 밀사 문제가 터져 나오고, 9월 17일에 고종 황제가 퇴위하였으며, 순종이 그 뒤를 이어 등극하였다. 그리고서 일제의 강요로 말미암아 12월 5일에 영친왕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 이끌려 서울을 출발하여 일본으로 떠났다. 이는 영친왕에게는 어머니 엄비(嚴妃)와의 영원한 이별을 의미하였고, 송설당에게는 ‘영친왕 보모’라는 직책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였다. 또 일제는 통감부를 설치한 뒤로 정부 조직에 대한 대대적인 정리 작업을 기획하면서 궁내부 조직을 축소하였다. 1907년 11월 27일 궁내부 신관제의 발포로 궁내부에 대한 대대적인 정리 작업 속에 여관(女官)들도 축소되었다. 그리하여 송설당은 궁궐에서 나와 1908년 1월에는 국동(麴洞)[서울 무교동 94번지]으로 옮겨 거처하였다. 즉 송설당의 궁궐 생활은 늦어도 1907년 말, 즉 영친왕이 일본으로 가던 시기에는 끝이 났다.
송설당의 궁중 생활은 10년 정도였고, 그 사이에 그녀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다. 80년 동안 내려온 가문의 숙원이던 조상의 신원 문제가 해결되었고, 또 그녀의 사회경제적인 위상이 완전히 바뀐 것이다.
[가문을 중흥하고 거부를 축적하다]
궁에 들어간 송설당이 잠시도 잊지 않은 문제가 조상 신원이었다. 1901년 11월에 고종 황제가 ‘몰적(沒籍)의 복권(復權)’을 내려준 것이다. 가문 중흥을 위한 송설당의 노력은 양제(養弟) 최광익(崔光翼)을 영릉(英陵) 참봉으로 만들었고, 뒤에 정3품으로 승격시켰다. 게다가 종형제 최한익(崔漢翼)과 최해익(崔海翼)도 6품 관직에 올랐다. 송설당은 가문을 현창하는 사업에 힘을 쏟았다. 1908년 5월에 우선 부친의 묘소를 다시 손질하고 돌을 세웠다. 그리고 화수회(花樹會)[같은 성을 가진 사람들이 친목을 위하여 이룬 모임이나 잔치]를 열고, 가문을 번듯하게 세우고자 원근 종친(宗親)에게 토지와 학자금(學資金)을 주었다. 또한 1912년 9월에는 최광익의 둘째 아들 최석두(崔錫斗)를 입양하여 양자를 맞아들였다.
송설당이 상경하여 가문의 ‘신원’을 달성했으니, 다음 과제는 조상 묘소를 찾는 일이었다. 회갑이 되던 1914년을 맞아 정주와 선천에서 오랫동안 잊어버리고 내려온 8대조까지의 선조 묘소를 찾아 묘를 보수하고 석물을 설치하였다. 이로써 송설당은 조상의 죄를 씻고 가문을 일으키면서 조상의 묘소를 찾아 석물을 안치하는 전통적인 문중의 현창 사업을 마쳤다. 이로써 어릴 때부터 절치부심(切齒腐心) 한스럽게 가슴에 담아 온 숙원 사업을 달성하였다.
한편 송설당은 궁궐에서 나오던 무렵에 거대한 재력을 갖추었다. 1912년 8월에 서울 무교동 94번지에 저택을 건립하고 ‘송설당(松雪堂)’이라는 당호를 내건 것이다. 당시의 송설당이 들어선 대지가 773.56㎡[234평]이며, 여기에 기와집이 들어선 것이다. 그리고 곳곳에 많은 의연금(義捐金)을 내놓았다.
궁중에 머물던 시기나 궁궐에서 나오면서 엄비로부터 토지를 받았다. 엄비는 영친왕을 낳고서 경선궁(慶善宮)이라는 궁호를 받았는데, 그곳에 많은 토지가 주어졌다. 따라서 경선궁 소속 궁방전이 전국에 걸쳐 무수히 많을 뿐만 아니라, 영친왕부에 속한 토지도 대단히 많았다. 엄비가 교육에 뜻을 두고 학교를 설립하고 나섰을 때 기부한 땅들이 그러한 것의 일부였다. 송설당 또한 궁중에 머물던 시절이나 궁궐을 나오면서 엄비로부터 상당한 양의 토지를 받았으리라 짐작된다.
더구나 당시에 토지를 둘러싸고 문제도 많았다. 1907년에 영친왕궁 소속 토지와 문서가 경선궁으로 이관되었다가 다시 동궁(東宮)으로 이관되는 변화가 있기도 하였다. 일제가 황실 재산을 국유 재산으로 정리하여 황실의 재정적 기초를 해체시키려 드는 과정에서 이에 맞서는 저항도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이 틈바구니에서 엄비는 경선궁과 영친왕궁 소유 토지를 교육 사업에 투입하기도 했지만, 다른 용도로 변경시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정황이 송설당의 토지 소유와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송설당이 소유한 토지는 김천을 비롯하여 대전 지역, 그리고 멀리 경상남도의 창원과 김해 지역 등 전국적으로 산재하였다.
[지극한 불심(佛心)으로 청암사를 중창하다]
송설당은 독실한 불교 신자로, 전국 사찰에 시주를 많이 하였다. 특히 서울로 올라온 뒤 봉원사(奉元寺)에 다니던 중 엄비의 동생과 만나면서 궁궐로 들어가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송설당의 불심은 상당히 깊었다. 심지어는 1930년 2월에 김천고등보통학교 설립 계획을 확정하면서 작성한 계약서에, 자신이 죽으면 장례를 불교식으로 치르고, 시신을 화장하여 석함에 안치하여 미리 만들어 둔 묘소에 안장할 것이며, 정걸재(貞傑齋) 대청마루에 불상을 봉안하라는 내용을 넣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불상을 봉안하면서 그 좌우에 ‘이왕전하(李王殿下)’와 ‘이왕비전하(李王妃殿下)’, 즉 영친왕의 내외와 송설당 자신의 존위(尊位)를 봉안하고, 양제 최광익 및 여동생의 위패를 모시라고 규정한 부분이다.
그리고 늦어도 1926년 이전에 촬영된 송설당의 사진을 보면, 머리에 족두리를 쓰고 한복을 입었다. 송설당이 입은 한복은 범어(梵語)로 가득 장식된 긴 옷고름을 앞에 드리워져 있으며, 보면 전통 한복에다가 불교식 장식을 가미되어 있다. 당시 신문은 그녀를 ‘활불(活佛)’이라 평가하기도 하였다.
송설당은 전국의 많은 사찰에 시주했는데, 규모도 상당했던 모양이다. 1911~1912년에 전국 30개 본산(本山) 사찰에 많은 금액을 시주하였다. 1914년에 청암사(淸巖寺), 영도사(永導寺)를 방문한 이야기나, 1915년에 경상남도 창녕의 화왕산(火旺山) 기슭에 있는 도성암(道成庵) 아래 거대한 바위에 큼직한 글씨로 ‘최송설당(崔松雪堂)’이라고 새겨진 각석, 법주사의 복천암(福泉庵)에 송설당이 시주한 80㎝ 높이의 두 개의 큰 촉대(燭臺)와 명문이 새겨진 명기(冥器), 또 북한산에 남아 있는 각석도 이러한 불심과 관련한 것들이다.
그런데 한 가지 눈여겨볼 만한 것은 청암계곡의 각석이나, 창녕 화왕산 도성암, 북한산의 ‘최송설당’이라는 각석의 글씨는 가로이든 세로이든 대개 1m 정도의 길이인데, 그 서체가 거의 동일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금강산에도 ‘최송설당(崔松雪堂)’이라는 대형 글자가 새겨진 각석이 남아 있다.
송설당의 시주 이야기는 김천의 청암사에 대한 것이 가장 대표적이다. 청암사 주지 대운당(大雲堂)과 송설당의 만남이 오늘의 청암사를 가져온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청암사 일주문을 들어서기 전 200여m 앞에 세워진 시주비가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높이 1m가 약간 넘는 자연석 표면을 갈아서 ‘대시주 최송설당(大施主 崔松雪堂)’을 새겨 넣었다.
[국은에 보답코자 자선 사업을 하다]
송설당의 자선 사업은 널리 알려져 왔지만, 그것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없다. 다만 기록에는 그의 첫 의연금 납부가 1908년 1월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리고 1910년대 초반에 송설당은 김천 교동(校洞)의 주민을 구휼하기 위해 벼 50석을 희사하여 소작인들로부터 ‘자모(慈母)’로 추앙을 받았으며, 또 1915년에는 경성부인회(京城婦人會)에 거금을 기부하고 일본적십자(日本赤十字社) 특별 회원이 되었다. 1917년에 어머니 정경옥이 죽으면서 “정재(淨財)를 육영(育英)에 써라.”라고 당부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해에 송설당이 김천공립보통학교에 기부함에 따라 총독이 포상하였고, 김천의 금릉유치원과 금릉학원에도 유지비를 기부하였다.
송설당이 본격적으로 사회사업에 나서려던 계획이 일반인들에게 알려진 사실은 1926년 11월 16일자 『조선일보』의 「최송설당(崔松雪堂)의 미거(美擧)」라는 신문 기사를 통해 확인된다. 송설당이 평소 소작인들에게 너그러웠고, 그래서 친부모와 다름없이 칭송을 받았으며, 그리고 ‘남자도 아닌 여자’가 72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전재산을 사회사업에 투자하기로 결심한 사실을 전하는 이 글은 송설당의 계획이 고아원이나 유치원 설립에 있다는 점도 알려 주고 있다. 아울러 이 기사는 “거룩하신 은혜를 입어서 모은 재산을 은혜롭게 사용하여 국은을 갚겠다.”는 그의 다짐도 담고 있다.
송설당은 192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일생을 정리하는 작업 가운데 마지막 일이라고 할 수 있는 재산 정리 방법으로 사회사업과 육영 사업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며, 그러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 했던 시기는 1926년 말이었다. 1929년에 김천의 금릉학원과 금릉유치원에 100 원씩 기부금을 냈던 일은 그러한 연장선에서 있었던 조그만 사례이다.
[만년을 정리하며 육영 사업을 구상하다]
1912년 국동, 즉 무교동 94번지에 ‘송설당’을 짓고, 이곳을 주된 거처로 삼은 그녀는 부지런히 서울과 김천을 오르내렸다. 그러면서 송설당은 점차 만년을 맞을 준비에 들어갔다. 우선 만년을 보낼 거처를 김천에 마련한다는 생각을 굳혀 나갔다. 만 65세가 되던 1919년에 송설당은 김천시 부곡동 뒷동산 고성산록에 ‘정걸재’를 지었다.
그 다음해, 즉 1920년에 정걸재 바로 뒤편에 자신이 묻힐 가묘(假墓)를 설치함으로써 일생을 마무리하는 수순을 일단 마친 셈이었다. 이에 더해 그녀의 삶을 회상하며 노래하거나 유명 인사들에게 부탁하여 받은 글을 모두 담아 문집을 펴냈다. 1922년 12월 1일에 3권 3책으로 발간된 『송설당집(松雪堂集)』이 그것인데, 국내만이 아니라 외국의 유명 도서관에도 발송되었다고 전해진다.
이제 남은 일은 오직 한 가지이다. 엄청난 재산을 처리하는 것이 바로 마지막 과제였다. 1920년대에 들어 주요 도시에서는 고등보통학교를 설립하려는 운동이 일어났다. 1900년대에 신교육을 표방하는 학숙·학당·학교가 설립되고, 1910년대에 보통학교로 편제되면서 1면 1교제로 나아가게 되고, 1920년대에 들어 고등보통학교 설립 운동이 일어났다.
김천에서도 1923년 1월에 고등보통학교 설립 기성회가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일시 중단되다가 1924년에는 발기인회를 재개하여 30만 원이라는 기금 목표를 내걸고 활동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어서 1925년에도 고덕환(高德煥)을 비롯한 중심인물들이 기성회를 추진하다가 중단되었는데, 1928년 3월 29일에 가서야 비로소 김천고등보통학교 기성회가 창립총회를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학교 설립에 대한 이들의 열망과는 달리 자금력은 턱없이 부족하였다. 뜻만 있고, 실행력이 없는 형편이었다.
그렇지만 당초 송설당은 김천고등보통학교 설립에 대한 적극적인 의도가 없었다. 육영 사업에 대한 뜻이 없던 것이 아니라, 고아원과 유치원 설립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자금력이 고등보통학교 설립에는 미치지 못할 것으로 판단한 것이라 짐작된다. 또 다른 한 가지 이유는 송설당은 당시 자신의 재산을 해인사에 시주하는 것과 유치원·여자 보통학교를 설립하는 두 가지 방향으로 가닥을 잡고 있었다. 그러다가 1929년 8월 이한기(李漢騏)를 비밀리에 상경시켜 자신의 재산을 조사하여 평가해 보라고 부탁하였다.
[전재산을 희사하여 송설교육재단을 설립하다]
송설당이 해인사에다 시주하려다 김천고등보통학교 설립으로 방향을 전환한 시기는 1930년 새해 벽두라고 짐작된다. 마지막 결단은 무엇보다 자신의 정확한 재산 평가 결과가 30만 원을 넘는다는 사실에 급선회한 것이다.
여기에 주요 인사들의 설득 작업도 주효하였던 것 같다. 당초 이한기가 송설당으로부터 재산 조사와 평가 작업을 부탁 받고서 조사 작업에 들어가는 한편으로, 해인사 시주를 목적으로 재산 조사 작업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김천고등보통학교 설립 운동에 앞장서고 있던 고덕환에게 알렸고, 자금 전환의 방안 모색에도 들어간 것이다. 그 결과 송설당과 인연을 가진 유력 인사들이 거의 총동원되다시피 하였는데, 이때 활약한 인물로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과 변호사 이인(李仁)이 대표적이다.
송설당은 1930년 2월 23일자로 이한기와 계약서를 작성하였다. 30만 원의 금액으로 ‘김천고등보통학교’를 경영할 목적으로 법인을 구성한다는 방침과 그 임무를 이한기에게 위임한다는 전제 아래 9개 항목으로 된 계약서를 작성한 것이다. 내용의 골자는 송설당 생계비 지급, 사후 장례와 제사 및 재단 명칭 등을 규정하는 것이다.
이어서 약정서(約定書)도 작성되었다. 30만 2100원이라는 총액과 세부 내역이 제시되었는데, 예금된 자금 10만 원과 전국에 산재한 논과 밭, 그리고 임야 등 부동산 20만 2100원이 골자이다. 이 계약서에 최석태(崔錫台)·최동열(崔東烈)·고덕환·이한기·김종호(金鍾鎬)·조상걸(曺相傑)·문창영(文昌永) 등 이사진 7명도 포함되었다.
송설당의 재산 희사 소식은 중앙 일간지를 통해 바로 세상에 알려졌고, 칭송의 소리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양대 일간지는 2월 26일자로 그 소식을 보도하였고, 의미를 찬양하는 논설을 연거푸 실었다. 이어서 2월 23일자로 작성된 전재산을 희사한다는 최송설당의 성명서와 3월 1일자로 발표된 ‘재단법인 송설당교육재단 김천고등보통학교 창립 사무 집행자’ 7인 이름의 포고문 전문(全文)이 함께 보도되었다. 그러자 김천에서는 4월 1일에 김천고등보통학교 후원회가 결성되었다. 줄곧 풀지 못한 채 1920년대를 넘어 온 숙원 사업이 바야흐로 눈앞에 현실로 나타나는 단계가 된 셈이다. 김천고등보통학교 설립 운동 본부를 이한기의 주소[대화정 299-1]에 두고 본격적으로 설립 계획을 밀고 나갔다.
[일제(日帝)의 반대를 극복하고 결국 민족 교육을 위한 인문계 학교를 인가받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처럼 장애가 나타났다.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인문계 학교 증설을 억제하는 정책을 폈다. 이에 따라 경상북도 학무과는 김천고등보통학교 설립 신청에 대해 김천고등보통학교가 아닌 상업이나 농업 학교, 즉 실업 학교로 방향을 잡으라고 요구하였다.
여기에서 송설당은 조선총독부에 강경하게 맞섰다. 인문계 고등보통학교가 아니라 실업계 학교라면, 아예 기부 사실 자체를 취소하겠다고 배수진을 치고 나온 것이다. 민족을 살려낼 인재를 양성하자면 실업 학교가 아니라 인문계 학교를 설립해야만 한다는 것이 송설당의 확고부동한 생각이었던 것이다.
1930년 5월에서 6월 사이에 추진 세력과 경상북도 사이에 공방전이 펼쳐졌다. 학교 설립을 위한 공식적인 발표가 나온 뒤 한 달 만인 3월 24일자로 설립 허가원을 경상북도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일은 쉽게 진척되지 않고, 진정하는 사람과 이를 거부하는 경상북도 사이에 갈등마저 벌어졌다. 그러는 사이에 송설당은 고향에서 살겠다며 1930년 6월 29일 김천으로 내려왔다. 김천역 앞에는 화환과 취주악대를 앞세운 환영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송설당이 김천고등보통학교 건설 예정지 뒤편에 자리 잡은 정걸재로 향하는 연도에는 사람의 물결이 넘실댔다. 이 길은 1981년에 김천의 ‘송설로(松雪路)’라 명명되었다.
본질적으로 조선총독부의 방침을 고치지 않고서는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는 판단에 이른 송설당은 결국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의 아내 사이토 하루코[齋藤春子]를 만나 협상을 벌였다. 1930년 후반에 들면서 점차 다시 희망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조선총독부가 기존 고등보통학교 제도를 일부 수정한 뒤에 김천고등보통학교를 여기에 맞추어 설립시킨다는 방안을 들고 나온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총독부는 1930년 10월 말에 김천고등보통학교 설립을 허가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였고, 1931년 1월 고등보통학교 규정 일부를 개정하여 인문계 학교의 교과 과정에 실업 과목을 첨가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송설당이 기부한 금액에 차이가 나타났다. 당초 제시했던 재산이 30만 2100원인데, 필요 경비가 32만 원으로 증액된 것이다. 설립이 1년 밀리게 되자 기본금 30만 2100원에다가 1930년도 수익 예상금 2만 6000원을 합친 예산안을 마련했는데, 물가 저락과 곡물 감소로 1만 6000원 부족분이 생겼다면서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제동을 걸고 나왔다. 이에 송설당은 결연한 의지를 보여 자신의 서울 처소인 ‘송설당’ 집을 내놓는다고 선언하고 나섰다. 그 평가액이 2만 3000원이므로 조선총독부의 이의 제기를 막아내는 데 충분한 것이었다.
[영남의 오아시스, 김천고등보통학교가 개교하다]
1931년 2월 5일에 ‘재단법인 송설당교육재단’이 인가를 받아, 3월 17일에 이른바 총독부 고시 제145호로 김천고등보통학교 설립이 조선총독부 학무국에 의해 정식으로 승인되었다. 재산을 한 푼도 남겨 두지 않고 모두 투입하겠다는 결연한 송설당의 의지가 승리를 거둔 것이다. 그래서 뒷날 “최송설당 여사가 사재 전부를 이 학교 설립을 위해 내놓고, 그 의기(意氣)가 본부(本府)[조선총독부]로 하여금 감동시켰기 때문에 특별히 김천고등보통학교에 설립 인가를 줌에 이르렀다. 이 인가는 물론 특별한 것”이라거나, “최 여사는 조선 여성사 또한 조선 문화사의 1항을 장식하기에 충분하다.”라고 평가되었다.
김천고등보통학교는 1931년 3월 27일과 28일에 입학시험을 치르면서 본격적인 학사 일정에 들어갔다. 3월 30일에 안일영(安一英)을 초대 교장으로 초빙하였고, 이어서 5월 9일에 강당을 준공하면서 입학식을 거행하고 수업을 시작하였다. 학생 수도 정원을 50%나 초과할 정도로 선발하여 인재 육성에 대해 욕심을 내는 한편, 서울 지역 교사 급여의 두 배나 되는 금액을 지급하면서 우수한 교사를 초빙하였다. 어느 재단보다 튼튼한 재력이 그 뒤를 받치고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1932년 1월 15일에 2대 교장에 정열모(鄭烈模)가 취임하였다. 이해 8월 31일에 김천고등보통학교 본관 교사가 준공되었다.
김천고등보통학교가 문을 열자, 김천만이 아니라 경상북도 지역 전체에서 학생들이 진학하였다. 김천을 중심으로 상주·의성·선산[구미]·성주·고령 등 경상북도 남서부 지역 일대의 학생들이 몰려들었고, 심지어 경상북도 동해안 지역 학생들도 진학하였다. 특히 인문 학교로 문을 열었기 때문에 진학 열기도 높았고, 교육 내용도 자연스럽게 민족 교육에 무게를 두게 되었다.
교장으로 재임하던 정열모는 1942년 10월 20일에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되고, 1944년 9월 30일에 예심 종결로 석방될 때까지 옥고를 치른 사실도 김천고등보통학교의 성격을 보여 주는 한 사례라고 생각된다. 또 송설당이 굳이 인문 학교를 고집하고 밀고 나간 이유도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인문계 김천고등보통학교 설립은 송설당 생애에서 마지막 승부수이자 대단한 성공작이었다.
[한국 육영 사업의 어머니 최송설당 기념 동상을 제막하다]
송설당이 만 80세가 되던 1935년에 김천고등보통학교에는 그를 기리는 대규모 행사가 준비되고 있었다. 개교 4주년을 맞은 그해 5월 9일에 교기 ‘청송백설기(靑松白雪旗)’가 제정되고, 그 자리에서 ‘김천고등보통학교 교주 최송설당 여사 기념동상건설기성회 발기준비회’가 결성된 것이다. 송설당이 생애를 마감하기 이전에 동상을 제작하여 봉헌하자는 추진 인물들의 의도가 담긴 것이다. 11인으로 구성된 실행 위원회가 구성되고, 김복진(金復鎭)이 제작을 맡았다.
동상 건립에 대한 호응은 전국적으로 대단한 열기를 보였다. 당시 동상 건립을 위해 10전에서 50원에 이르는 성금을 보내 온 인원이 단체와 개인을 합쳐 1천 명을 넘었다. 신의주고등보통학교·동래일신여학교·대구계성학교 등의 교직원이 단체로 보내온 경우, 심지어 ‘금오산공립보통학교 교직원 및 아동 일동’이란 경우도 있었다. 조만식(曺晩植)·방응모(方應模)·윤치호(尹致昊)와 같은 인물이 보이는가 하면, 울릉도 도사(島司)의 참여도 있었다. 또 국내만이 아니라 도문(圖門)과 같은 만주 지역에서 성금을 보내 온 인물도 있었다.
동상 제막식은 1935년 11월 30일에 열렸다. 그 자리에는 송진우(宋鎭禹)·여운형(呂運亨)·방응모·백남훈(白南薰)·최규동(崔奎東)·이인 등 유력 인사를 비롯하여 각지에서 1천여 명이 참석하였다. 그 자리에서 『조선중앙일보』 사장 여운형은 기념사를 통해 김천고등보통학교를 ‘사막의 오아시스’로 비견하였다. 또 송설당이 특별 교실[과학관] 건립에 필요한 건축 비용을, 재단에서 지급한 생활비를 아껴 모은 자신의 마지막 재산으로 감당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완전히 빈손으로 돌아가겠다고 천명한 셈이다.
당시 세간에서는 송설당의 업적을 기리는 이야기가 모든 사람들에게 회자되었다. 『동아일보』·『조선일보』·『조선중앙일보』 등 주요 일간지들이 뉴스와 논설로 송설당의 업적을 찬양하였고, 동상 제막식 참관 소감을 연재하기도 하였다. 동상 제막의 의미를 “사회(社會)를 위(爲)한 헌신적(獻身的) 실행인(實行人)으로서의 활교훈(活敎訓)의 씸볼로 볼 것”이라고 정리하면서, 송설당을 본받은 제3의 교육 투자가를 기다린다면서 독려하고 나서기도 하였다. 이는 송설당의 행적을 교훈 삼아 ‘확대 재생산’하라는 주문이었다.
[마지막 궁중 여류 시인 최송설당의 문학과 그 세계]
송설당의 문학 작품은 형식적인 면에서 한시, 시조, 계몽기 가사 등의 다양한 특성이 혼재해 있다. 그녀는 시문(詩文)에 능하여 억지로 꾸미지 않아도 절로 뛰어난 글을 이루었다. 굳은 절조와 장부다운 기상이 있어 충분(忠憤)·우국(憂國)의 정서를 시로 표현하였으나 경전의 의리로 다진 사상적 바탕과 타고난 천성이 우아하고 고상하여 그 시문 역시 예스럽고 우아하며 아름다워 한 점의 속된 기운이 없었다. 이미 동시대인들은 송설당의 시문에 대하여 허례(虛禮)로서가 아니라 작품 자체가 지닌 가치성에 입각한 객관적인 평가를 하였다.
효·교육·자아·사회·국가 의식 등을 주제로 담은 시들은 송설당이 몸소 겪었던 현실로 시적 대상이 나로부터 세계에 미치었다. 더구나 송설당의 시는 선조의 설원(雪冤)을 성취한 때인 1901년을 전후하여서부터 1922년 『송설당집』을 발간하기 이전에 창작되어 시적 공간은 주로 나라 잃은 시기였다. 현실을 직시하여 인간답게 사는 일로부터 나라를 회복하고 세계의 평화를 염원했던 애민·애국·우국의 간절한 정회는 많은 시에서 느낄 수 있으나 그것은 극도로 절제된 시어에 은미(隱微)하게 함축되었다는 특성이 있다. 특히 송설당의 문학 작품은 근대로의 이행기에 창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형식이나 이념은 근대의 영향권 밖에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녀를 조선조 마지막 궁중 여류 시인이라 일컫는 것이다.
[길이 사학을 경영하여 민족정신을 함양하라]
송정(松亭) 정걸재에서 만년을 보내던 송설당은 1939년 6월 16일 오전 10시 40분에 만 84세로 한 인생을 마감하였다. 그녀는 떠나기 보름 전인 5월 30일에 “길이 사학을 경영하여 민족정신을 함양하라! 잘 교육받은 한 사람이 나라를 바루고 한 사람이 동양을 눌러 편안케 할 수 있다[永爲私學 涵養民族精神 一人定邦國 一人鎭東洋].”라는 유언을 남겨, 학교 유지와 인재 양성에 대한 당부를 하였다.
이어 송설당은 생활비를 아껴 저축한 마지막 재산마저도 학교에 편입한다고 유언하였다. 매월 지급된 생활비를 아껴 저축하였다가 이마저도 모두 기부한 것이다. 기본금 출자와 특별 교실 설립에 대한 2차 기부에 이어, 이것은 생의 마감을 앞두고 행한 마지막이자 3차 기부였다. 어느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송설교육재단에 희사하고 그는 떠났다.
장례는 7일장으로 치러졌다. 6월 22일 학교장(學校葬)으로 진행된 장례식은 오전 8시에 발인하고, 10시에 금정(錦町) 공설 운동장에서 고별식을 가진 뒤, 시내를 한 바퀴 돌아 송정으로 향하였다. 각계각층의 인사가 조화를 보내왔고, 일간지들도 다투어 장례식을 보도하고 특집을 연재하기도 하면서 송설당의 공을 기렸다. 이후 김천고등보통학교에서는 매년 6월 16일 모든 교직원과 학생 그리고 유족이 참여하여 송설당을 모시는 제사를 거행하고, 묘소를 참배하고 있다. 1963년 8월 15일 대통령 문화 포상이 추서되었다.
송설당의 생애에서는 두 번의 큰 전기가 있었다. 하나는 만 41세 되던 1896년에 상경하여 돌파구를 열어 나간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만 75세 되던 1930년에 김천고등보통학교 설립을 작정하고 나선 것이다. 전자의 경우, 즉 상경하여 돌파구를 열어 간 그의 노력은 누대의 숙원 과제인 가문 신원을 달성하고, 자신이 계산하기 힘들 만큼 많은 재력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이에 비해 김천고등보통학교 설립을 작정하고 나선 후자는 기념할 만한 업적이었다. 특히 후자는 김천 사회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옴으로써 더욱 빛나 보인다. 김천이 다수의 인재를 배출한 계기는 바로 김천고등보통학교 설립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주인공이 바로 송설당이었다. 그러므로 송설당은 활기의 김천과 이상의 김천으로 변화시켜 천만세에 영원히 빛날 업적을 남긴 것이다.
송설당은 전근대 사회에서 태어나 근대 사회로 이행하는 단계를 살다간 여성이다. 여성이라는 처지와 불우한 집안 출신이라는 중첩된 한계를 깨쳐 나갔다는 점에서, 그리고 일제 강점기에 자신의 모든 재산을 사회사업과 민족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 사업에 투자한 업적은 한국 근대 여성사의 한 장을 장식하기에 충분하다. 더불어 한시는 물론 여러 편의 언문 사조(詞藻)를 보건데, 송설당을 국문학사에서 ‘조선조 마지막 궁중 여류 시인’으로 평가함은 당연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