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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열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887
한자 鄭烈模
영어음역 Jeong Yeolmo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송호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1895년 11월 1일연표보기
수학 1912년 3월연표보기
수학 1914년 3월에연표보기
수학 1916년연표보기
활동 1916년연표보기
수학 1921년 3월연표보기
수학 1925년 3월연표보기
활동 1925년 4월 1연표보기
활동 1929년 9월연표보기
활동 1931년 4월연표보기
활동 1932년연표보기
활동 1932년 1월연표보기
활동 1932년 1월 2일연표보기
활동 1941년연표보기
활동 1943년 3월 7일연표보기
활동 1945년 10월연표보기
활동 1945년 8월 18일연표보기
활동 1946년연표보기
활동 1946년연표보기
활동 1946년 3월연표보기
활동 1947년 6월연표보기
활동 1949년 6월연표보기
활동 1950년연표보기
활동 1954년연표보기
활동 1955년 10월연표보기
활동 1958년 4월연표보기
활동 1964년 4월연표보기
활동 1965년연표보기
활동 1965년연표보기
활동 1965년 1월연표보기
몰년 1967년 8월 14일연표보기
출생지 충청북도 회인군
거주|이주지 충청북도 회인
활동지 경상북도 김천
성격 교육자|국어학자
성별
대표 경력 김천고등보통학교 교장|대종교 원로원 참의|홍익대학 초대 학장|김일성종합대학 언어학교수

[정의]

일제 강점기 김천 지역에서 활동했던 교육자·국어학자.

[활동 사항]

정열모(鄭烈模)는 1895년 11월 1일 충청북도 회인군 향상사동[현 충청북도 보은군 회북면]에서 정해윤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장기(長鬐)이다. 정열모는 회인보통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상경하여 경성고등보통학교나 다른 학교에 적을 두면서 주시경이 주도한 조선어강습원에 참여하여 1912년 3월 중등과 제5회를, 1914년 3월에 고등과 제2회를 수석으로 수료하였다. 이후 1916년 경성고등보통학교 부설 사범과[교원양성소]를 수료하고 평안북도에 있는 자성보통학교와 의주보통학교 교원으로 재직하였다.

1921년 3월 정열모는 일본의 와세다대학[早稲田大學] 고등사범학부 국어한문과에 입학하여 1925년 3월에 졸업하였다. 재학 중이던 1927년 7월에 유학생들과 함께 교육실업단을 조직해 방학 기간 중 국내에서 순회강연을 하였다. 강연회에서 정열모는 ‘우리의 살 길’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다. 또한 일본에서 『조선일보』와 『신소년』에 동화와 동시, 교양 수필을 투고하였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정열모는 1925년 4월 1일부터 중동학교에서 조선어 교원으로 근무하다가 1932년 초에 신설된 김천고등보통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조선어연구회와 1927년 창간된 동인지 『한글』의 동인으로도 활동하면서 조선어연구회와 조선어학회에서 개최한 강연회와 강습회에도 적극 참여했으며, 조선어사전편찬위원,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위원, 표준어 사정위원 등으로도 활동하였다. 당시 정열모는 함께 한글을 연구하던 김두봉·신명균·권덕규·장지영·최현배 등과 가까지 지냈으며, 특히 신명균을 선배로 가깝게 모셨다고 한다.

1931년 4월 정열모는 김천에서 설립된 사립 김천고등보통학교의 교무주임으로 자리를 옮겼다. 김천고등보통학교는 영친왕의 보모 출신인 최송설당이 재산을 기부하여 설립한 학교였다. 그는 김천고등보통학교에서 교무주임으로 근무하면서 조선어와 조선사와 수신을 강의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32년 1월 김천고등보통학교 2대 교장으로 취임한 후 교사와 과학관 기숙사 등 학교 시설 건립을 주도하였다. 이 시기 정열모는 김천의 ‘천(泉)’ 자를 파자하여 백수(白水)를 호로 삼을 정도로 김천 지역에 애착을 가졌다. 그는 경성부 수송동에서 김천읍 남산정으로 주거를 옮기고, 1936년에는 다시 김천읍 대화정[현 평화동]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나 조선어학회사건으로 말미암아 정열모는 1943년 3월 7일자로 교장직을 사임하게 됐는데, 당시 그는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로 유치된 상태였다. 그는 장지영(張志瑛)과 함께 1944년 9월 30일 공소 소멸로 석방된 후 김천읍 다수동의 농가에 칩거하였다.

1945년 8월 18일 정열모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김천지방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1945년 9월 8일에는 한국민주당 발기에 참여하여 임시정부 지지 성명서에 서명하였다. 같은 해 10월 숙명여자전문학교 문과 과장으로 취임하였고, 12월 31일에는 통일정권촉성회에도 참여하여 좌우 정당의 합작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1946년 3월 국학전문학교의 초대 교장을 맡았다. 이어 1947년 6월에는 홍문대학관 관장에 취임했는데, 1949년 6월 홍문대학관이 홍익대학으로 개편되자 초대 학장이 되어 1950년 2월까지 재임하였다. 정열모는 같은 시기 조선어학회가 한글학회로 개칭하자 이사로 선임되자 국어 연구를 재개하는 한편으로 1929년에 간행된 『현대조선문예독본』이란 중등용 독서 자습서를 1946년 2월 『한글문예독본』으로 재간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같은 제목으로 ‘담권’을 발행하였다. 이들 서적은 한글문화보급회와 신흥국어연구회라는 단체 이름으로 간행되었는데, 정열모는 이들 단체의 회장으로서 한글 보급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이후 분단이 가시화되는 가운데 정열모김구김규식의 남북 협상을 지지하며 1949년 5월 민족자주연맹 서울시연맹 부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이러한 활동과 관련하여 그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1949년 12월 서울지방검찰청 수사과에 구속되기도 하였다. 또 1950년 5월에는 김천에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하였다.

정열모는 대종교 신자였다. 그는 1922년 4월 15일에 대종교에 입교하여 1925년 11월 교질(敎秩)이 참교(參敎)가 되었다. 해방 후 대종교 활동이 재개되자 1949년 1월 정교(正敎)의 지위에서 대형(大兄)의 교호(敎號)를 받았다. 1946년 4월 이후 총본사 전강, 종리연구실 찬수(贊修), 총본사 전리 전강 등의 교직을 맡았고, 1950년에는 원로원 참의가 되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일어난 후 정열모는 납북되었다. 그리하여 1955년 10월 김일성종합대학 언어학교수, 1958년 4월 사회과학원 언어학 연구실 교수, 1964년 4월 사회과학원 후보 원사, 1965년 1월 사회과학원 언어학 연구실 교수와 후보원사 등에 임명되어 왕성한 연구 활동을 하다가 1967년 8월 14일 향년 73세로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1929년 『신생(新生)』 9월호에 「주시경과 그 주위의 사람들」을 발표했고, 『조선일보』 1932년 1월 2일자에 「방언 규정(規正)에 노력(努力)이 필요」, 1941년 『조광』 9월호에 「십년」 등을 발표하였다. 저서로 『신편고등국어문법』[4, 1946], 『한글문예독본』[1946], 『신라향가주해』[국립출판사, 1954], 『향가연구』[사회과학원출판사, 1965], 『조선어 고어역사』[고등교육도서출판사, 1965] 등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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