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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204
한자 金羅里
영어음역 Geumna-ri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감문면 금라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송기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1914년연표보기
변천 1934년연표보기
변천 1949년연표보기
변천 1988년연표보기
변천 1995년연표보기
성격 법정리
면적 2.8㎢
가구수 114세대[2015년 12월 31일 기준]
인구(남, 여) 258명(남자 136명, 여자 122명)[2015년 12월 31일 기준]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 감문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금보동(金寶洞)의 ‘금’자와 나가동(羅伽洞)의 ‘나’자를 따서 금라동(金羅洞)이라 하였다.

[형성 및 변천]

조선 말 김산군 위량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나가동·금보동이 통합되어 김천군 위량면 금라동으로 개편되었다. 1934년 곡송면과 위량면을 통합하여 신설된 감문면 관할이 되었고, 1949년 금릉군 감문면 금라동으로 개칭되었다. 1988년 동(洞)을 리로 바꾸어 금라리가 되었고, 1995년 김천시 감문면 금라리가 되었다.

[현황]

금라리는 2010년 11월 30일 기준 면적은 2.8㎢이며, 2015년 12월 31일 현재 인구는 총 114세대에 258명(남자 136명, 여자 122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동쪽으로 보광리, 서쪽으로 남곡리·은림리, 남쪽으로 구야리개령면 남전리, 북쪽으로 삼성리와 이웃하고 있다. 동쪽으로 지방도 913호선이 남북 방향으로 지난다. 자연 마을로 나가동·금보동·양지뜸·웃뜸·음달뜸이 있고, 117호 가운데 약 80여 호가 김녕 김씨(金寧金氏)일 만큼 김천 최대의 김녕 김씨 집성촌이다. 평야에 자리 잡고 있어 예부터 벼농사가 발달했으며 최근에는 포도와 참외 농사로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금라리의 본동이라 할 수 있는 나가동[일명 나아골, 나골]은 임진왜란 때 김이환(金爾環)·김이방(金爾芳) 형제가 난을 피해 이거하여 마을을 개척한 이래 마을 뒷산의 숲이 울창하고 산세가 수려하며 많은 꽃이 만발하여 신라(新羅)와 가야(伽倻)의 경승지와 비견될 만하다 하여 신라의 ‘라(羅)’자와 가야의 ‘가(伽)’자를 따서 나가동이라 하였다.

감문면으로 통합되기 전 위량면 소재지로 1950년대까지 2일과 7일에 5일장이 섰다. 마을 앞에는 일제 강점기에 축조한 저수지가 있는데 못 가에는 이 마을 출신으로 1999년 세상을 떠난 향토 한학자 나헌(羅軒) 김인규(金仁圭)의 송덕비가 있다. 마을 뒷산인 운학산[일명 봉화산]에는 공개바위에 얽힌 전설이 전해 온다. 옛날 감문국의 두 장수가 돌 쌓기 시합을 하다가 시비가 붙어 쌓던 돌을 화풀이로 던진 것이 현재까지 산중턱에 얹혀 있다고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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