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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259
한자 興平里
영어음역 Heungpyeong-ri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흥평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배순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1914년연표보기
변천 1934년연표보기
변천 1949년연표보기
변천 1988년연표보기
변천 1995년연표보기
성격 법정리
면적 9.36㎢
가구수 95세대[2015년 12월 31일 기준]
인구(남, 여) 174명(남자 81명, 여자 93명)[2015년 12월 31일 기준]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진흥(眞興)의 ‘흥(興)’자와 평전(平田)[일명 평밭]의 ‘평(平)’자를 따서 흥평(興平)이라 하였다.

[형성 및 변천]

조선 말 김산군 과곡외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진흥·평전·고노실[일명 외고(外古)]·점터[일명 내고(內古)]가 통합되어 김천군 과곡면 흥평동으로 개편되었고, 1934년 김천군 구성면 흥평동이 되었다. 1949년 금릉군 구성면 흥평동이 되었고, 1971년 평전이 흥평1동, 고노실·점터·진흥이 흥평2동으로 분동되었다. 1988년 동(洞)을 리로 바꾸어 흥평리가 되었으며, 1995년 김천시 구성면 흥평리가 되었다.

[자연 환경]

흥평1리 평전 동북쪽으로 덕대산, 동쪽에 국사봉이 솟아 있다. 흥평2리 진흥 남쪽으로 매봉산, 서쪽으로 국사봉이 가로막고 있다. 미산골의 뱀이 개구리를 물고 있는 형상이라는 사두혈(蛇頭穴)이 국사봉에서 뱀과 같이 길게 내려 뻗은 지맥이 이곳에서 잘린 듯 끊어져 있다.

[현황]

흥평리는 2010년 11월 30일 기준 면적은 9.36㎢이며, 2015년 12월 31일 현재 인구는 총 95세대에 174명(남자 81명, 여자 93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동쪽으로 양각리·송죽리, 서쪽으로 대항면 대성리, 남쪽으로 송죽리·상거리, 북쪽으로 대항면 덕전리와 이웃하고 있다. 흥평1리·흥평2리 두 개 행정리로 이루어졌으며 진양 강씨 집성촌이다.

자연 마을로는 평밭·진흥·고노실·점터 등이 있다. 평밭은 김해 김씨 김건휘(金建彙)가 300년 전 장남 김각(金珏)을 비롯한 4형제를 데리고 난을 피해 이주한 후 밭을 개간하며 평화롭게 살았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김해 김씨 집성촌이고, 경작지가 적어 사과와 자두를 주로 재배하며 송이버섯이 많이 난다.

유적으로는 1390년 정몽주(鄭夢周)의 문인 이미숭(李美崇)이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 회군으로 실권을 장악하자 덕대산으로 들어가 항거할 때 쌓았다는 덕대산성 성곽이 일부 남아 있다. 마을 입구에는 150년 전 마을 주민이 벗 다섯 명과 의기투합해 우정의 정표로 다섯 그루의 나무를 한데 묶어 심었다는 느티나무가 정자목 구실을 하고 있다.

진흥은 마을 뒤 덕대산 자락에 신라 시대 고찰인 진흥사가 있었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점터는 옛날 이곳에 쇠를 다루는 철점(鐵店)이 있어 붙인 이름이다. 안쪽에 있는 오래된 마을이어서 내고라고도 한다. 고노실은 점터에서 내려오다가 국사봉 쪽으로 비좁은 길을 따라 들어가 자리 잡은 마을로 역사가 오래되어 붙인 이름이다. 가장 바깥쪽에 있는 오래된 마을이므로 외고라고도 한다. 또 옛날 서당이 있었던 까닭에 서당골로도 불린다.

마을 앞 정자나무에서 보면 고노실에서 점터로 넘어가는 야트막한 고개가 있는데 이 고갯마루에서 옛날 이 마을에 살았다는 달성 서씨 부잣집 터가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온다. 옛날 이곳에 부유하게 살던 달성 서씨가 시주 온 승려를 박대하자 최씨 성을 가진 머슴이 머슴살이에서 벗어날 요량으로 몰래 쌀을 시주하며 그 방편을 물었다. 머슴은 승려가 일러 준 대로 고노실 앞 미산골 사두혈 명당 터를 호미로 세 번 긁었고 이후 엄청난 비가 쏟아져 산사태가 나서 서씨 부자는 망하고 최씨 머슴은 소원대로 머슴살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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