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4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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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孔子洞戰鬪 |
영어음역 | Gongja-dong Jeontu |
영어의미역 | Gongja-dong Battl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대성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호동 |
발생|시작 | 1592년 7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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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 1592년 9월 |
발생|시작 장소 |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대성리 |
종결 장소 |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대성리 |
성격 | 전투 |
관련 인물/단체 | 김시민|정유한|이우빈|모오리 |
[정의]
임진왜란 당시 공자동에서 일어난 김천의 대표적 전투.
[경과]
왜장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가 이끄는 왜군이 개령현에 왜군 후방 사령부를 구축하자 그 소속 부대가 대항면 공자동에 포진하고 있었다. 1592년 7월 봉계 출신의 좌수 정유한(鄭維翰)이 피란 갔다가 잠시 봉계마을에 들러 창의 격문을 보고 봉계에서 의병군 150명, 대항면에서 100명을 모아 김산군수 이우빈에게 인계하였다.
당시 이우빈은 5월 25일 왜군이 김산에 당도하자 보은으로 피신하고 있었다. 이우빈은 의병군을 이끌고 삼성암에 진을 치고 있다가 7월 12일 삼기산으로 이진하였고, 정유한은 다시 의병군 약간을 모아 흑운산에서 형세를 관망하고 있었다. 9월 초순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의 주선으로 진주목사 대리 김시민(金時敏)이 군병 2,000명을 거느리고 김산에 와서 공자동에 있는 왜적을 분쇄하려고 이우빈의 군병으로 하여금 적을 입석 판교로 유인케 하고 이곳에서 합동으로 섬멸하고자 하였다.
[결과]
유인한 왜적을 김시민 의병군이 습격하고 세 차례의 싸움 끝에 공자동을 탈환하였다. 그러자 개령의 적군이 이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직지사 입구에서 적의 원군을 만난 김시민은 말에서 내려 응전했는데 쌍방 간 화살이 비오듯 했다 한다. 봉계의 정유한이 덕령 북지산에서 그 전말을 목격하고 『백년록(百年錄)』에 공자동전투에 대한 사항을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