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6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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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得培祭壇碑 |
영어음역 | Gim Deukbae Jedanbi |
영어의미역 | Altar Monument for Gim Deukba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남산동 1 김천문화원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주림 |
관련 인물 생년 | 131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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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몰년 | 1362년 |
보수|복원 | 1894년 |
현 소재지 | 경상북도 김천시 남산동 1 김천문화원 |
원소재지 | 경상북도 김천시 어모면 구례리 |
성격 | 제단비 |
양식 | 석조 |
관련 인물 | 김득배[1312~1362]|김정필|황난선|김숙원 |
재질 | 오석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142㎝[높이]|59㎝[너비]|23㎝[두께] |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 남산동에 있는 조선 전기 때 세워진 김득배의 제단비.
[개설]
김득배(金得培)[1312~1362]는 본관은 상산(商山), 자는 국자(國滋), 호는 난계(蘭溪)이다. 불훤재(不諼齋) 신현(申賢)의 문하에서 포은 정몽주, 이우당 이경 등과 학문을 닦아 1330년(충숙왕 17) 문과에 급제한 뒤 내직과 외직을 두루 거쳤다. 1359년(공민왕 8) 홍건적이 침입하자 서북면 도지휘자로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 등과 분전한 끝에 함락된 서경(西京)을 탈환하고 적을 압록강 밖으로 격퇴시키는 데 수훈을 세웠다. 이 전공으로 정당문학(正堂文學)이 되고 상낙군(上洛君)에 봉해졌다.
1361년(공민왕 10) 20만의 홍건적이 다시 쳐들어와 개경이 함락되었을 때도 서북면 도병사(道兵使)로 안우·이방실·최영·이성계 등과 총병관 정세운(鄭世雲)의 휘하에서 개경을 수복하는 데 수훈을 세운 문무겸전의 공신이 되었다. 뒤에 김용(金鏞)의 모해로 죄 없이 상주에서 효수를 당했다. 뒤에 문충공(文忠公)의 시호가 내려지고 옥성서원(玉成書院)에 제향되었다.
[건립 경위]
김득배 제단비는 공의 묘소가 실전되어 명종 초 주손(胄孫)이 사는 어모면 여남내동(汝南內洞)에 6세손인 도사 김정필(金丁畢)이 세웠다. 1894년(고종 31) 다시 황난선(黃蘭善)이 찬명(撰銘)한 것을 방계 후손 진사 김숙원(金肅源)이 글씨를 써서 개수하였다.
[위치]
김득배 제단비는 김천시 어모면 구례리에 있었으나, 지금은 김천시 남산동 1번지 김천문화원에 있다.
[형태]
높이는 142㎝, 너비는 59㎝, 두께는 23㎝이며, 서체는 해서(楷書)이다.
[금석문]
1980년대로 추정되는 탁본이 현재 김천문화원에 소장되어 있다. 비문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문충공난계김선생제단비 『예기(禮記)』에 조(祧)[조상을 제사 지내는 사당]에서 제사를 받을 수 없는 조상은 단(壇)을 만든다고 하였으니 산소가 없어서 단을 만드는 것은 옛날의 예법이 아니다. 그러나 흠모의 정을 붙일 곳이 없어 단을 만들어 제사 지내는 사람이 있으니 먼 조상을 추모하는 데 해가 되지 않고 오히려 후하게 대접하는 것이 될 것이다. 대개 조상의 기(氣)는 즉 자손의 기이니, 하나의 기를 가지고 서로 감응하는 정성을 쌓는다면 신령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니 장차 어느 곳에서든 제사 지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선비인 김인식(金仁植), 김주식(金周植)과 진사(進士) 김창식(金昌植)이 나에게 부탁하며 고하기를 ‘선조인 난계 선생은 바로 고려의 충현(忠賢)입니다. 『상산지(商山誌)』에는 산소가 주(州)의 남쪽 10리 지역에 있다고 실려 있는데 여러 번 전쟁을 겪어 아무리 헤아려 보아도 알 길이 없습니다. 6세손 도사공(都事公)이 거주하던 김산군(金山郡) 여남내동에 가서 단을 설치하고 매년 제사를 지낸 것이 수백 년입니다. 이제 그 옆에 비석을 세우고자 하여 이에 『고려사(高麗史)』 본전(本傳)과 집안에 전해 오는 옛 문적을 가지고 와서 감히 비석에 새길 글을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작위도 없고 문장도 없다고 두 번 세 번 사양하였으나 할 수 없어서 마침내 가져온 것을 살펴보고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