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6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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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陵勝覽 |
영어음역 | Geumneungseungnam |
영어의미역 | Chronicle of Geumneung |
이칭/별칭 | 『금릉지(金陵誌)』 |
분야 | 문화·교육/언론·출판,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남권희 |
[정의]
1718년(숙종 44) 여이명(呂以鳴)이 김천 지역의 지리, 인물, 풍속, 군사, 건물 등을 기록하여 편찬한 향토지.
[개설]
‘금릉(金陵)’은 김천의 옛 지명으로, 조선 시대 김산군(金山郡)의 별호(別號)였다. 이 지역은 조선 전기 김산현 관내에 제2대 정종의 태를 묻었다고 하여 이웃의 어모현을 폐합하여 합친 후 김산군으로 승격하였다. 1914년 개령군·김산군·지례군을 김천군으로 통폐합했는데, 이때 김천면이 김천군의 군청소재지가 되면서 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1931년 김천면이 김천읍으로 승격되어 김천시의 기틀을 이루게 되었으며, 1949년 김천읍이 시로 승격될 때 김천군의 나머지 지역은 금릉군으로 개칭되어 15개 면을 관할하게 되었다.
[편찬/간행 경위]
여이명이 쓴 『금릉승람(金陵勝覽)』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에 이미 『여지승람(輿地勝覽)』이나 간략하게 엮은 지방지가 많지만 지은 지가 오래되어 그 사이의 기록이 빠진 것이 많고, 또 후에 수찬하고자 하나 고증하기가 어려운 점이 많다. 금릉(金陵)이 비록 작은 마을이지만 인근 한 상주(尙州)나 성주(城州)에 비해 문헌의 양이 뒤지지 않으며, 금릉에도 군지(郡誌)가 있었을 것이나 지금 없는 것이 안타까워 이자형(李子亨)과 함께 읍지를 편찬하려 하였다. 그러던 차에 이자형은 죽고 나의 나이는 고희(古稀)에 임박했으나 이자형의 당부와 나의 의지로 편찬을 계속하였다. 자료의 수집과 고증은 비문에서 취하기도 하고, 전설(傳說)을 캐서 베꼈으며, 언행(言行)을 증거 할 수 없는 것은 뒷날의 고증을 기다렸다. 이목(耳目)이 미칠 수 없는 것은 그 아래에 간략한 주(註)를 달아 완성하고 ‘금릉지(金陵誌)’라 이름하였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금릉승람』은 『금릉지(金陵誌)』로 불린다.
[형태/서지]
필사본으로 크기는 가로 18㎝, 세로 27㎝이며 총 106쪽으로 이루어졌다. 찾아가는 전통문화체험박물관 관장인 손희준이 개인 소장하고 있다. 2000년 전장억(全章億)이 번역한 것을 김천문화원에서 전체 356페이지로 간행하였다.
[구성/내용]
김산군을 6방으로 나누고 각 방에는 인물을 중심으로 기술하였다. 권두에 여이명의 서문이 있고, 이어서 ‘금릉건치연혁고증(金陵建置沿革考證)’, ‘지계고증(地界考證)’, ‘십육면고증(十六面考證)’, ‘산천고증(山川考證)’을 비롯한 지대(池臺), 향교(鄕校), 산찰(山刹), 군병(軍兵), 군기(軍器), 호구(戶口) 등 총 47개의 고증(考證) 항목을 통해 지리, 인물, 풍속, 군사, 건물 등에 관하여 상세히 기술하였다.
『금릉승람』에서 여이명은 ‘김천’의 유래를, “옛날 금이 나는 샘이 있어 김천이란 이름이 생겼다. 그 샘의 물로 술을 빚으면 맛과 향기가 좋아 그 샘물을 주천이라 했다. 그러나 그곳 주민들이 금을 캐서 바치는 부역이 두려워 그 샘물을 묻어 버렸기 때문에 지금은 위치를 알지 못한다. 과하주는 여산주·호산춘과 더불어 국내에 이름난 술이다. 다른 지역 사람이 김천 사람에서 술 빚는 방법을 배워서 술을 빚어도 이곳 술과 같지 않다. 아마도 샘물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의의와 평가]
김천 지역에서 간행된 향토지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조선 시대 김천 지역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