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0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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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言論出版 |
영어음역 | Eollon Chulpan |
영어의미역 | Journalism and Publishing |
분야 | 문화·교육/언론·출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재성 |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에서 매체를 통하여 어떤 사실이나 주장을 알려 여론을 형성하거나 인쇄물을 제작·복제하여 판매 또는 배포하는 일의 총칭.
[개설]
김천 지역의 언론은 신문이 주로 맡고 있는데 신문은 지면 신문과 인터넷 신문으로 세분할 수 있다. 신문이 언론으로서 대중화된 것은 일제 강점기 때부터이다. 일제 치하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언론인으로 활약한 인물로 이정득(李正得), 이강래(李康來), 김수길(金壽吉), 박한동(朴漢東), 이산(李山), 김태연(金泰淵), 최석채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구국 항일의 의지가 굳고 지사적 또는 투사적 정신으로 신문의 보급은 물론 지역민의 의식 계발을 위해 유치원, 학원을 설립하는 데 앞장섰고 민중 계몽과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한 청년회 운동을 선도했다.
특히 김단야로 더 잘 알려진 김태연은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서 같은 사회주의자였던 김준연, 박헌영 등과 함께 국권 회복 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는데 『조선일보』에 입사하기 전부터 김천에서 지하 신문을 발행하고 아포, 개령 등지에 배포해 민족 사상을 고취하는 데 앞장섰다.
이정득은 철저한 항일 민족주의자로서 1924년부터 『동아일보』 김천지국장을 맡아 대쪽 같은 성품으로 언론, 육영, 청년 및 식산 운동에 앞장섰다. 최석채는 『대구매일신문』과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하며 언론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세계 언론 자유영웅 50인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1945년 광복과 함께 언론 자유화의 물결 속에 많은 신문사가 창간되고 2000년대 들어 인터넷의 보급에 따라 인터넷 신문도 크게 늘어났다.
[변천]
1. 지면 신문
김천 지역에서 발간된 지면 신문으로는 『문화시보(文化時報)』, 『김천신문』, 『금릉시보』, 『김천어린이신문』, 『대구일보』 부록 『김천보』, 『김천시보』, 『영남신문』, 『경북신문』, 『천릉민보』, 『김천금릉민보』, 『김천신문』, 『새김천신문』, 『황악신문』, 『경북자치신문』 등이 있다.
1946년 5월 김천 출신인 김기수가 대구에서 창간한 『문화시보』를 1948년 4월 김천으로 사옥을 옮겨 온 것이 김천 지방 신문의 효시가 되었다. 1949년 4월 17일 『김천신문』으로 제호를 바꾸고 향토 신문으로서 시민으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다. 6·25 전쟁으로 중단되고 1951년 6월 속간한 『김천신문』은 손흥수, 김정환 등이 기자로 활약하며 1955년까지 발행하다가 그해 4월 20일 정부통령 선거의 감천 백사장 유세를 특집으로 다룬 것이 화근이 되어 그해 7월 폐간되었다.
『금릉시보』는 1956년 여름 『김천신문』이 폐간된 지 1년 만에 발간되었는데 발행인 겸 편집인 변익진(邊翊鎭)이 심문(沈文)을 사장으로 추대하여 주간 시보의 출범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창간 초부터 여당 성향이 짙다는 여론으로 호응도가 약한데다가 재정난이 겹쳐 중단되고 말았다.
『김천어린이신문』은 1956년 2월 『대구매일신문』 김천지국 부록판으로 출발하여 순간(旬刊)으로 나왔다. 손흥수가 주간으로 아동 문예 작품을 위주로 학원 소식 등을 주간으로 보도했고 시내 초등학교 아동을 상대로 정서 교육과 문예 교실 역할을 했다.
『대구일보』 부록 『김천보』는 1956년 여름 『대구일보』 지국장 남치홍(南致洪)이 지방 신문이 없어진 데 착안하여 타블로이드판으로 주 1회 『김천보』를 발행했다. 무료로 배부하여 반응도 좋았으나 『대구일보』가 폐간되는 바람에 막을 내리고 말았다.
『김천시보』는 1960년 9월 2일자로 허가되어 『김천신문』에서 맥을 이어온 신문이다. 『김천시보』는 타블로이드 배판으로 매주 금요일 발행되었으며, 대구카톨릭시보사 출판국에서 인쇄했다. 김천문화원장 강중구(姜重求)를 중심으로 각계를 망라한 25인으로 후원 단체인 25시회(25時會)가 조직되었다. 『김천시보』는 무료로 배부하였으며 좌담회, 웅변 대회 등 일련의 사업도 전개했는데 1961년 5·16 혁명 이후 5월 23일 폐간되었다.
1960년 10월 대구에서 발간되던 주간지 『영남평보』의 판권을 인수한 최재숙(崔在淑)이 김천으로 옮겨와 제호를 『영남신문(嶺南新聞)』으로 바꾸어 발행했다. 『영남신문』은 지형이 2절판으로 색달랐으며 인쇄에 불편이 많아 김천에 인쇄 시설을 갖추려하자 5·16 혁명이 일어나 좌절되고 말았다.
『경북신문』은 1960년 11월 남치홍(南致洪)이 창설한 신문으로 타블로이드판 주간지였다. 발행인 남치홍이 경영하던 문화인쇄사에서 찍어냈는데 이로써 김천에는 당시 지방지가 3사로 늘어나서 언론의 풍성함을 누린 시기였으나 군사 정권에 의해 폐간당했다. 군정이 끝나고 제3공화국이 수립되어 어느 정도 사회가 안정되어 갈 무렵인 1965년 10월 30일 『천릉민보』가 창간되어 기대를 모았으나 경영난으로 곧 폐간했다. 1983년 8월 2일 등록하고 1990년 1월 1일자로 여인섭에 의해 창간호가 나온 타블로이드판 1장짜리 『김천금릉민보』는 월간이었기 때문에 속보성 있는 기사보다는 생활 정보나 문화 기사 등을 주로 실었다. 20호를 끝으로 제호를 바꾸면서 폐간되었다.
『김천신문』은 1989년 제6공화국 출범과 더불어 언론 자율화의 물결을 타고 김중기가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등록하여 1990년 격주간 타블로이드판 칼라 16면을 창간호로 발행했다. 창간 1년 만에 24면으로 증면했으며 1991년 7월 10일부터는 격주간을 주간으로 타블로이드판을 대판으로 바꾸었다. 2010년 8월 26일 현재 965호가 발행되었으며 2009년 4월부터 월간지 『월간김천』을 매월 자매지로 발간하고 있다.
『새김천신문』은 『김천금릉민보』를 인수한 김영만이 사장을 맡아 경비 일체를 부담하고 1992년 3월 21일 격주간 대판 8면을 발행했다. 그러나 1995년 1월 5일 139호를 끝으로 『새김천신문』은 중단하고 취재 구역을 광역화하여 『시민신문』으로 발행했다. 이 『시민신문』은 5호를 끝으로 1995년 3월 『김천신문』과 통합했다.
1993년 7월 창간호를 낸 대판 주간 『황악신문』은 이현종이 발행인 겸 편집인을 맡았다. 시사성 있는 내용을 심층 취재하는 형식을 취하였으며 63호까지 발간 후 폐간되었다. 『경북자치신문』은 1997년 7월 창간호를 낸 대판 8면의 격주간 신문인데 발행인 겸 편집인은 하정태로 2010년 10월 말 현재 360호가 발행되었다. 2002년 1월 2일 창간한 『김천문화신문』은 박혜경을 발행인으로 하여 타블로이드 배판 12면으로 매주 발행되고 있다.
2. 인터넷 신문
2000년대 들어 인터넷이 보편화되면서 2000년에 『한길정보넷』, 2002년에 『김천넷』과 『김천조은뉴스』, 2005년에 『김천인터넷신문』과 『김천투데이』, 2008년에 『김천핫뉴스』 등 인터넷 신문이 속속 창간했다.
3. 출판물
출판물로는 김천문화원에서 정기적으로 간행하는 『김천문화』가 있으며 2010년 현재 41호를 발간하였다. 『김천문화』는 출판이 용이하지 않았던 1950년대와 1960년대 김천 지역에서는 유일한 문화 소식지로서 향토 문화 예술인들에게 작품 활동을 통한 세상과의 소통의 장을 마련해 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1988년에 한국문인협회 김천지부 창립총회를 기념하는 시화전을 개최한 이래 매년 동인지 『김천문학』을 발간해 26집에 이르고 있다.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김천지회는 1991년부터 매년 『김천예술』을 발행하고 있으며, 청소년들의 예술 문화 체험의 장인 김천예술제를 2010년 현재까지 18회째 개최해오고 있다.
[현황]
2009년 말 김천에 출판, 인쇄 및 기록 매체로 등록한 사업체수는 30개이며 87명이 종사하고 있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서적출판업 1개 사업체에 1명 종사, 신문, 잡지 및 정기 간행물 출판업 5개 사업체에 34명 종사, 인쇄업 23개 사업체에 47명 종사, 인쇄 관련 사업 1개 사업체에 5명이 종사하고 있다.
2010년 12월 31일 현재 김천 지역에서는 『김천신문』, 『경북자치신문』, 『김천문화신문』 등의 지면 신문과 『한길정보넷』, 『김천넷』, 『김천인터넷신문』, 『김천투데이』, 『김천핫뉴스』 등의 인터넷 신문이 언론 활동을 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김천은 일제 강점기 때부터 김태연, 이정득, 최석채 등 지사적 면모를 갖춘 언론인들이 다수 배출되었고 광복 후 크고 작은 신문사가 설립되어 중소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언론문화가 크게 발달한 면모를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