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7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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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用超 |
영어음역 | Gim Yongcho |
이칭/별칭 | 내성재(內省齋),문절(文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병우 |
몰년 | 140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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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 고려 후기[충정왕] |
출생지 | 경기도 용인시 |
거주|이주지 | 경상북도 김천시 부항면 유촌리 |
묘소|단소 | 경상북도 김천시 부항면 유촌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의성(義城) |
대표 관직 | 충청도병마도절제사 |
[정의]
조선 전기 김천으로 이주한 문신.
[가계]
본관은 의성(義城). 아버지는 판서 김수덕(金修德)이며, 부인은 옥산 장씨이다. 아들로 김화(金華), 김경(金鏡), 김감(金鑑)을 두었다.
[활동 사항]
김용초(金用超)[?~1406]는 고려 말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났다. 성품이 꾸민 데가 없이 수수하고 곧으며 무재(武才)가 있었다. 충정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문관이면서도 무예(武藝)가 뛰어나 활쏘기와 말 타기를 능가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공민왕과 함께 사냥하면서 날아가는 새를 백발백중으로 맞추고, 백 발자국 밖의 나뭇잎을 맞추어 말 한 필을 상으로 받기도 하였다. 이 내용은 백문보(白文寶)가 지은 시에 잘 나타나 있다.
1390년(공양왕 2) 왜구가 양광도에 침범하자 밀직부사로서 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왜구 100여 명을 사살하면서 평정하였고, 조선 건국에 참여하여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 되었으며, 호남도병마도절제사(湖南道兵馬都節制使)와 충청도병마도절제사를 거쳐 관찰사를 지냈다. 관직에서 물러나 김천시 부항면 유촌리에서 살았다. 1406년(태종 6)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태종은 제문을 지어 보내고 3일간 조회(朝會)를 폐하였다.
[묘소]
묘소는 김천시 부항면 유촌리 용현(龍峴)에 있다.
[상훈과 추모]
병조판서에 추증하고, 시호를 문절(文節)이라 하였다. 김용초 신도비(金用超神道碑)와 영모당(永慕堂)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