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7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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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好誠 |
영어음역 | Yi Hosung |
이칭/별칭 | 동산(東山),정무(靖武)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병우 |
출생 | 139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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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 1427년 |
활동 | 1449년 |
활동 | 1452년 |
활동 | 1455년 |
활동 | 1457년 |
활동 | 1459년 |
활동 | 1460년 |
활동 | 1461년 |
몰년 | 1467년 |
출생지 | 경상북도 김천시 양천동 |
묘소|단소 | 경상북도 김천시 양천동 |
성격 | 무신 |
성별 | 남 |
본관 | 광평(廣平) |
대표 관직 | 경상좌도병마절도사 |
[정의]
조선 전기 김천 출신의 무신.
[가계]
본관은 광평(廣平). 호는 동산(東山). 할아버지는 이회, 아버지는 이영선(李寧善)이다. 외할아버지는 평절공(平節公) 한옹(韓雍)이다. 아들로 이거인을 두었다.
[활동 사항]
이호성(李好誠)[1397~1467]은 지금의 김천시 양천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열중하고 달리는 말을 잡을 수 있을 정도로 말 타기와 활쏘기 등 무예에 출중하였을 뿐만 아니라 병법에도 능통하였다. 1427년(세종 9) 무과에 합격하여 사복시 직장(司僕寺直長)이 되었고 군기시부정을 역임하였다. 1441년(세종 23) 김종서(金宗瑞) 등이 장수 적임자로 천거할 만큼 무예와 신임이 두터웠으며, 화포의 법을 상세하게 알고 있었다. 세종은 동계 감련관으로 삼아 화포를 교습하여 불우의 변에 대비하게 하였다.
1449년(세종 31) 거제현령이 되어 외직으로 나갔다. 이곳에서 민폐를 제거하면서 읍을 옮기고 성을 쌓아 민생을 안정시켰다. 북방의 오랑캐 방비에 대한 공로가 더해지면서 민심과 명망을 얻었다. 문종이 즉위하면서 첨지중추원사로 승진하였고, 1452년(문종 2) 공조참의가 되었다. 1453년(문종 3) 평안도체찰사 이양(李穰)과 함께 평안도에 가서 북변에서 방비를 돌아보았고, 최윤덕(崔潤德)을 따라 북정(北征)에 참여하여 편비(偏裨)가 되었다. 이때 이호성이 향하는 곳마다 맞설 적이 없어서 비장군(飛將軍)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경상우도처치사(慶尙右道處置使)를 거쳐 세조가 즉위한 1455년 동지중추원사가 되고 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1457년(세조 3) 경상좌도병마절제사가 되었으나, 이듬해 노병(老病)이 든 편모(偏母)를 봉양하기 위해 사직하면서 북방과 남방에서 경험한 바를 토대로 국방에 대한 대책을 제시하였다.
이호성의 대책은 왜인의 변란에 대한 것으로 연변제읍(沿邊諸邑)의 제색군인(諸色軍人)을 동서양계(東西兩界)의 예와 같이 각기 본 읍에 소속하여 수비하게 하고, 영진군(營鎭軍)은 내지(內地) 군사로 소속시켜 불의의 일에 임하도록 하며, 아울러 서로 긴밀하게 협조할 수 있는 방책과 나아가 야인(野人)의 침입에 대한 대책으로 지형적으로 유리한 곳에 대성(大城)을 쌓아 후환을 미리 제거하자는 것이었다. 세조는 흔쾌히 계책을 받아들여 평안도 의주(義州)와 삭주(朔州) 등의 읍성(邑城) 가운데 낮은 곳을 먼저 쌓게 하였다.
1459년(세조 5) 행첨지중추원사겸경상좌도도절제사(行僉知中樞院事兼慶尙左道都節制使)가 되었다가 이듬해 동지중추원사로 중앙에 돌아왔다. 세조는 신하들과 윤대하는 자리에서 이호성이 대장군임을 강조하고 그와 사후(射侯)할 것을 공언하며 무공을 높이 평가하였다. 세조는 1461년(세조 7) 경상우도처치사로 보냈으며, 이때 변경(邊境)의 흔단(釁端)을 잘 처리하였다. 이것은 우리나라 사람이 고기 낚는 왜인과 싸우다가 왜인을 살상한 사건으로 서로 싸운 사람을 잡아 국문(鞫問)하여 원만하게 처리하였던 것이다.
1466년(세조 12) 세조가 후원에서 군사 훈련을 참관할 때 대장이 되어 진퇴 조작의 형세를 펼쳐 보였고, 평안도절도사가 숙배할 때 신숙주(申叔舟) 등과 평안도 방어에 관해 의논하기도 하였다. 이때 세조는 술자리를 베풀어 격려하기도 하였다. 1467년 세조는 이호성이 연로(年老)해 군사에 관한 일을 관장(管掌)할 수 없다 하여 오위도총부도총관의 직(職)을 그만두게 조치하였다. 이해 이호성은 향년 71세의 나이로 고향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호성은 관직 생활 중 20년을 변방에 머물렀으며, 수위(戍衛)하여 산천(山川)의 험이(險易)를 잘 알아 공격하고 수비할 때에 꾀하는 바가 실책(失策)이 없었다. 항상 나라를 근심하며 봉공(奉公)하는 것을 지성(至誠)으로 하였으며, 언제나 강병비변(强兵備邊)을 우선으로 삼았다. 그러면서도 직분을 지켜 추호(秋毫)도 범한 것이 없었으며, 재물을 멀리하여 의복에 두터운 갖옷[重裘]이 없었다. 병이 위독하여 시첩(侍妾)이 호곡(號哭)하자 “남자는 부인(婦人)의 손에서 죽지 않는다”라며 단호하게 물리쳤다고 한다.
[묘소]
묘소는 김천시 양천동 안정포 뒷산에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정무(靖武)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