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8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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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鴻發 |
영어음역 | Bak Hongbal |
이칭/별칭 | 여빈(汝彬),도은(道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임삼조 |
출생 | 161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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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 1671년 |
추모 | 1864년 |
출생지 | 경상북도 김천시 |
거주|이주지 | 경상북도 김천시 조마면 신곡리 |
성격 | 선비 |
성별 | 남 |
본관 | 순천(順天) |
[정의]
조선 후기 김천 출신의 선비.
[가계]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여빈(汝彬), 호는 도은(道隱). 할아버지는 박수종(朴守宗)으로 단종 복위 운동에 참여하였다. 박홍발(朴鴻發)[1610~1671]의 유허비에는 할아버지의 이름이 박원복(朴元福), 벼슬은 참봉(參奉)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는 명종 때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를 역임한 박경순(朴景淳)이다. 어머니는 남양 홍씨(南陽洪氏)와 완산 이씨(完山李氏)이다. 박홍발은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인은 김해 김씨(金海金氏)로 김득은(金得殷)의 딸이다. 자녀는 아들 두 명을 두었다. 큰아들 박창룡(朴昌龍)은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증직되었고, 둘째 아들 박천룡(朴天龍)은 무과 출신이다. 집안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우의정을 지낸 정후공(靖厚公) 박가흥(朴可興)과 방계 조상으로 충정공(忠正公) 취금헌(醉琴軒) 박팽년(朴彭年)이 있다.
[활동 사항]
박홍발은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으로 강화 조약이 체결되자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르도록 한 자가 누구며, 굴욕적인 조약을 맺은 자가 누구냐!”라고 적은 글을 당세 권세가와 부귀가에게 보내고, 자신은 춘추대의(春秋大義)에 따라 세상을 등지고 지금의 김천시 조마면 신곡리의 오도산(吾道山) 밑에서 은둔하였다.
[묘소]
묘소는 김천시 조마면 신곡리 새석이마을에 있다.
[상훈과 추모]
후손이 감모재(感慕齋)를 지었다. 방계 후손인 박승동(朴昇東)이 1864년(고종 1) 조마면 신곡리 새석이마을에 모박홍발 유허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