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9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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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權泰錫 |
영어음역 | Gwon Taeseok |
이칭/별칭 | 몽우(夢牛)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송호상 |
출생 | 1895년 8월 1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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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 1919년 5월 23일 |
활동 | 1922년 3월 |
활동 | 1924년 5월 |
활동 | 1926년 |
활동 | 1927년 2월 |
활동 | 1929년 2월 |
활동 | 1945년 12월 26일 |
활동 | 1945년 9월 1일 |
활동 | 1946년 1월 |
활동 | 1946년 4월 |
활동 | 1947년 12월 20일 |
활동 | 1947년 5월 |
몰년 | 1948년 8월 23일 |
추모 | 2006년 |
출생지 | 경상북도 김천군 김천면 남산정 174-1번지 |
성격 | 사회주의 운동가|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신간회 총무간사|건국준비위원회 중앙집행부 위원|한민족당 대표|민족자주연맹 중앙집행위원 |
[정의]
일제 강점기 김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권태석(權泰錫)은 1895년 8월 18일 경상북도 김천군 김천면 남산정 174-1번지[현 경상북도 김천시 남산동 174-1번지]에서 태어났다. 호는 몽우(夢牛)이다. 권태석은 충청도 홍성에서 중국과 중개 무역을 하던 최익환과 동업을 했는데, 3·1운동 직전 길림을 다녀 온 후 최익환의 권유로 대동단에 가입하였다.
1919년 5월 중순에 접어들면서 3·1운동의 열기가 식어 가자 대동단은 독자적인 만세 시위운동을 추진했다. 그러나 5월 23일 일본 경찰이 서울에서 남작 김가진 등 20명 이상의 귀족이 신문 기자단과 대동단 회원 및 학생 등과 연합하여 독립 선언서를 배포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당일 아침 이능우·최익환을 시작으로 권태석·나경섭·김영철 등을 차례로 검거하였다. 당시 권태석은 문서 인쇄와 배포에 필요한 자금을 제공했으며, 최익환과 함께 문서를 인쇄하고 배포하려다 체포당했다.
출옥 후 권태석은 최익환 등 초기 대동단 지도부 일부와 청년·학생 그룹에 속했던 인물들과 함께 서울청년회 조직에 관여하며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하였다. 1922년 3월 권태석은 장덕수가 주도하던 사상 단체인 세계협회에 참여하였다. 또한 1924년 5월 국내에서 통일적 당 창립을 목표로 한 조직인 13인회의가 결렬된 후 서울파의 고려공산동맹이 체제를 재정비할 때 최익환과 함께 고려공산동맹에 가입하였다.
1926년 7월에는 민족 협동 전선의 결성을 위해 만들어진 조선민흥회의 발기에 참여했으며, 그 해 12월에는 서울에서 당 통합 운동을 적극 전개하던 안광천의 권유로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하필원과 함께 중앙집행위원 조직부원으로 활동하였다. 아울러 조선민흥회 준비위원과 상무위원으로도 선출되었다. 1927년 2월 권태석은 조선민흥회 발기인대회에서 신간회와 합동하기로 결의하는 과정에서 합동위원이 되어 신간회에 가담했으며, 신간회 창립대회 직후 서무부 총무간사로 선임되었다.
같은 해 12월 권태석은 서울 춘경원에서 열린 서울파의 조선공산당 제3차 당대회에서 ‘운동 방침에 관한 테제’를 제출했고, 1928년 1월에는 『조선일보』에 「조선 사회운동 개관」을 실었다. 1929년 2월 권태석은 조선공산당사건으로 체포되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6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다 1934년 6월 석방되어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해방 후인 1945년 9월 1일 권태석은 건국준비위원회 중앙집행부 위원으로 위촉되었으며, 무경부장을 맡기도 하였다. 또한 같은 해 12월 26일 창당된 신한민족당 정치국 차장에 임명되었다. 1946년 1월 한민족당 대표로 임시정부가 주최한 비상정치회의주비회에 참여해 비상정치회의 기초위원으로 활동했으며, 같은 해 4월에는 민족주의 진영의 4개 정당이 한국독립당으로 합당할 때 신한민족당 대표로 참여하여 조사부장에 임명되었다.
모스크바삼상회의를 둘러싼 좌우간의 대립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권태석은 1947년 5월 모스크바삼상회의의 실천을 강조하면서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가 한국독립당에서 제명당했다. 이후 권태석은 민주한독당 창당을 주도하고 중앙상무위원으로서 미소공동위원회에 참가하고자 하였다. 1947년 12월 20일 여운형 암살 이후 중도 세력의 강화를 목적으로 결성된 민족자주연맹 중앙집행위원이 되었으며, 1948년 4월 22일 김규식 등과 함께 남북 협상에 참여하였다. 이후 권태석은 1948년 8월 다시 북으로 가던 중 23일 해주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2006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