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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492
한자 獨立運動
영어의미역 Independence Movemen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김일수

[정의]

일제 강점기 현 경상북도 김천 지역에서 전개된 민족 독립 운동.

[개설]

일제 강점기 현 경상북도 김천 지역에서도 일제의 침탈에 맞서 민족 독립 운동이 전개되었다. 개항 이후부터 한일 병합 조약에 이르는 시기에는 국권 수호와 회복을 위한 운동으로 의병 전쟁과 계몽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1910년 국권 피탈 이후로 이러한 국권 회복 운동은 조국 광복을 위한 민족 독립 운동으로 이어지면서 1919년의 3·1운동과 1920년대의 국내외 무장 투쟁으로 발전하여 근대적인 국민국가 수립을 목표로 하는 민족 운동으로 승화되었다. 그리고 1930년대 이후로는 군국주의 일본의 전쟁 정책을 반대하고 조국 광복과 자주적 근대 국가 수립을 목표로 하는 항일 독립 운동의 전개로 이어졌다.

[구한말 국권 회복 운동]

국권 회복 운동은 의병 전쟁과 계몽 운동, 그리고 구국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김천 지역의 경우 국권 회복 운동의 일환으로 1896년 김산장의군(金山杖義軍)이 일어나 의병 전쟁을 전개하였고 지역의 유림들이 적극 참여하였다. 지역 출신으로 김산장의군에 참여한 여중룡은 『남은유고(南隱遺稿)』에서 관련 기록을 남기고 있다. 또한 1908년 지례군 거물리에서도 의병이 일어나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다. 일제 관헌 기록에 따르면 그 외에도 김천 지역에서는 1907년부터 1912년까지 지속적으로 일제의 침탈에 맞선 의병 항쟁이 전개되었다.

계몽 운동으로 김천 지역에서는 비밀결사 신민회에 김태연과 편강렬이 참여하였다. 또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에 적극 동조한 을사오적을 제거하려는 오적제거계획(五賊除去計劃)이 추진되었는데, 김천 지역의 여영조·나인영·이기·오기호·윤주찬·김민석·민형석·최동석 등이 여기에 참여하였다. 1907년 경제적 계몽 운동의 차원에서 국채 보상 운동이 일어나자 김천에서도 금주단연회가 조직되어 국채 보상 운동에 동참하였다. 뿐만 아니라 김천 지역에서는 계몽 운동의 주요 방향이었던 학교 설립 운동도 활발하게 일어났다.

[1910년대 독립운동과 3·1 운동]

1910년 국권 피탈 이후 일제의 무단 폭압 정치 하에서 조국의 광복을 위한 독립 운동이 대한독립의군부, 조선국권회복단, 대한광복회 등의 비밀결사에 의해 전개되었다. 그리고 1919년 1차 세계 대전 이후의 국내외 정세 변화를 계기로 민족 독립을 이루기 위한 노력이 3·1운동으로 나타났다.

이에 김천 지역에서도 서울과 대구에서 전개된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김천 시내를 비롯한 관내 주요 면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먼저 3월 11일 서울과 대구의 독립 만세 운동의 영향을 받아 김수길김충한이 중심이 되어 용두동 시위가 계획되었다. 이후 3월 20일 개신교와 천주교 신자들이 연합한 교회연합 시위, 3월 24일 용두동 시위운동, 4월 1일 만천봉 만세 시위 등이 발생하였다.

또한 개령에서는 3월 24일부터 4월 6일까지 4차례에 걸쳐 독립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양천동에서도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뿐만 아니라 일본헌병대 구내에 들어가 만세 운동을 벌이는가 하면, 편지를 통해 일제에 대한 한국 지배의 부당성과 독립 의지를 표현하는 투서 운동도 일어났다. 3·1운동 직후 김천 지역의 유림은 유림 세력이 중심이 되어 전개된 독립 청원 운동으로 일어난 파리 장서 사건에 참여하였다.

[1920년대 독립운동]

3·1 운동 이후 독립 운동은 국내외에서 무장 투쟁과 폭탄 테러 등의 방법으로 독립을 달성하여 근대적인 국민 국가 수립하겠다는 민족 운동으로 승화되었으며 이와 더불어 임정 군자금 모집 및 군정서 모병 운동, 대한독립후원 의용단 등이 일어났다. 또 사회주의 사상이 유입되면서 독립 운동도 이념적으로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1920년대 접어들어 지역에서는 대중 단체 결성과 활동을 통한 민족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고, 경상북도 독립 운동의 주요 기반이 되었다. 1920년 금릉청년회의 결성으로 시작된 청년 운동은 김천청년연맹, 김천청년동맹으로 확대 발전되어 지역 대중 운동의 선구가 되었다. 1922년에 결성된 김천형평지사는 조선조 이후로도 계속 이어져온 백정에 대한 신분 차별에 맞서 신분 해방을 지향하는 운동을 벌였다.

그리고 여성 운동·노동 운동·소년 운동 등 대중 운동 단체가 속속 결성되어 일제의 침탈로 인한 대중들의 사회 경제적 위기를 원호하고, 대중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며, 식민지 현실을 자각케 하여 민족 독립의 의지를 북돋웠다. 1927년 국내외에서 민족주의계와 사회주의계가 협동 전선을 구축하여 민족 운동의 지도 기관을 설립하자는 민족협동전선운동이 일어나 신간회가 창립되었다. 김천 지역에서도 그 흐름에 따라 신간회 김천지회와 근우회 김천지회가 설립되어 지역의 사회 운동을 이끌었다.

[1930년대 독립운동]

1930년대 이후 항일 독립 운동은 군국주의 일본의 전쟁 수행을 반대하고 나아가 조국 광복을 목표로 국내외에서 전개되었다. 이 시기 김천의 대표적인 운동은 비밀리에 결성된 조공재건그룹 김천협의회의 활동이었다. 이는 1920년대의 지역 사회 민족 운동의 역량을 바탕으로 하여 일제의 만주 침략 이후 전쟁 정책에 반대하면서 민족 독립을 위해 전개한 운동이었다.

[의의와 평가]

김천 지역의 독립 운동은 유교적 전통이 기반이 되고 있었다. 개항 이후 외세의 침탈에 대항하여 유교적 가치와 전통을 유지하고자 하는 위정척사운동이 나타났다.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이후에도 유교적 전통과 일정한 관련이 있는 비밀 결사 운동이 펼쳐졌고 파리 장서 사건에도 깊숙이 관여하였다. 또 일제 강점기 대표적 독립 운동인 3·1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3·1 운동 이후 독립 운동이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로 분화되고 대중 운동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김천 지역의 민족 운동은 전국적인 흐름에 동참하면서도 지역의 사회 문제를 민족 문제와 연관시키면서 독립 운동으로 발전되어 갔다.

1930년대 일제의 만주 침략 이후 지역에서는 조공재건그룹 김천협의회가 결성되어 1920년대의 지역 사회 운동을 확대시키고 전국적 차원의 운동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민족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따라서 김천 지역의 독립 운동은 식민지 민족 운동이 전국적으로 승화되고, 국내외에서 끊임없는 독립 운동이 전개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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