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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925
한자 金忠漢
영어음역 Gim Chunghan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송호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1883년 10월 24일연표보기
수학 1906년연표보기
활동 1906년연표보기
활동 1919년 5월 5일연표보기
몰년 1965년 12월 30일연표보기
추모 1990년연표보기
출생지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비봉동 707번지
활동지 대구광역시|김천시
묘소 대구광역시 동구 신암동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3·1 만세 시위

[정의]

일제 강점기 김천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김충한(金忠漢)은 1883년 10월 24일 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비봉동 707번지에서 태어났다. 미국인 선교사 어드만(W.C. Erdman)의 전도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가 문중과 가정에서 쫓겨났던 김충한은 1906년 새로 건축한 비봉교회 초대 조사로 활동했으며, 이후 대구 계성학교를 다니던 중 목사가 되기 위해 평양신학교로 진학하였다.

1919년 평양에서 고향으로 내려가던 중 서울에서의 만세 시위를 목격한 김충한은 3월 9일 김천에 있는 황금동교회에서 당시 대구에서의 만세 시위에 가담했다가 일본 경찰의 체포를 피해 김천으로 온 계성학교 학생 김수길을 만나 김천에서의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이 자리에는 황금동교회의 원로인 최용수와 교회 조수 한명수가 함께하였다. 그날 밤 황금동교회에서 열린 두 번째 모임에서는 주남태와 김원배, 차경곤 등도 참석하였다.

김충한 등은 태극기를 제작하고 경고문을 인쇄하여 김천장날인 3월 11일 오후 3시에 살포하고 용호동 감천교 아래에 집결한 후 시장 터에서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하였다. 이를 위해 김충한김수길과 함께 경고문을 작성했으며, 주남태 등이 만든 태극기와 함께 경고문을 인쇄하고, 이를 김천공립보통학교 생도들에게 배포하면서 시위 참가를 권유하였다. 그러나 경고문을 등사한 등사기를 김천저축계 사무실로 돌려보내는 과정에서 일본 헌병분대에 발각되었다. 이로 인해 황금동교회에 모인 주동 인물 네 명을 비롯하여 모두 일곱 명이 검거되었고, 시위 계획은 완전히 실패하였다.

1919년 5월 5일 김충한대구지방법원에서 2년형을 언도 받았다. 출옥 후 1923년에서 1931년까지 대구 동산병원 전도회 소속의 목사로서 경상북도 지역에서 교회 설립 활동을 전개했으며, 이후 김천 송천교회황금동교회 목사로 선교와 후배 양성에 전력하다가 82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묘소]

묘소는 대구광역시 동구 신암동에 있는 신암선열공원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90년 건국훈자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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