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17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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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察訪善政碑 |
영어음역 | Chalbang Seonjeongbi |
영어의미역 | Memorial Stone to Stationmaster for Exemplary Service as a Government Official |
이칭/별칭 | 김천역장송덕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남산동 3-12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송기동 |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 남산동에 있는 조선 시대 김천역 역대 찰방들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
[개설]
김천역은 『고려사(高麗史)』 병지역참조(兵志驛站條)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경산부도(京山府道)[현 성주]에 속한 속역으로 김천역과 함께 작내역[지례현], 추풍역[어모현], 부상역[개령현], 장곡역[지례현] 등 김천 지역의 5개 역이 나타난다. 세종 대에 44역도, 538속역 체제로 개편하면서 김천도역(金泉道驛)으로 승격되고 관할에 17개 속역을 거느리는 큰 규모의 역으로 개편된다. 이때 김천도는 추풍역[김산군], 문산역[김산군], 부상역, 양천역[개령현], 작내역, 장곡역 등 김천 지역의 6개 역을 비롯하여 대구, 성주, 구미, 고령 등 인근 17개 속역을 거느린 큰 규모의 역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어 세조 대는 멀리 경상남도 함양, 거창, 합천 지역의 역까지 포함한 21개 역을 관할하기에 이르고 영조 대 19개소, 19세기 말에는 20개소의 속역을 관장하는 큰 역으로 발전한다.
김천도가 관장하고 있던 역로(驛路)는 경상우도에 편제되어 있었는데, 부산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경상우도의 노정이 부산포-양산-김해-창원-영산-창녕-현풍-무계역-부상역-김천역-추풍역-황간-영동-옥천-문의-청주-진천-죽산-양지-용인-낙생역-양재역-서울로 이어지는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교통의 요지였다. 김천도역은 찰방 집무소인 동헌과 숙소인 내동헌이 12칸, 형리청, 양마청 등 82칸, 기타 병기고와 찰방 이정기(李正基)가 세운 관덕루(觀德樓)라는 다락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런 연유로 역이 있던 김천초등학교 일대는 지금도 찰방골로 불린다.
[건립 경위]
찰방 선정비는 통상 찰방이 이임 또는 퇴직한 직후 건립되었는데, 역모에 연루되었거나 비리에 연루되어 파직되지 않는 한 대부분의 찰방에게 관례적으로 선정비를 세워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천도 찰방 선정비의 경우에 조선 말 간행된 『김천도역지(金泉道驛誌)』를 근거로 볼 때 역 어귀 노상에 건립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대부분 사라지고 지금은 4기만이 남아 있다.
신류(申留)는 병술년 문과에 급제한 아주 신씨(鵝洲申氏)로 1649년(효종 즉위년) 2월에 부임하여 1650년(효종 1) 6월에 퇴임하여 고향 의성으로 낙향하자 역리들이 주동이 되어 선정비를 건립하였다. 이극태(李克泰)는 신묘년 문과에 등과한 완산 이씨(完山李氏)로 1653년(효종 4) 1월에 부임하여 1655년(효종 6) 6월에 승진하여 이임하자 건립하였다.
이정억(李楨億)은 임오년 문과에 급제한 한산 이씨(韓山李氏)로 1702년(숙종 28) 11월에 부임하여 1705년(숙종 31) 1월에 퇴임하여 고향 보령으로 낙향하자 역리들이 건립하였다. 이현장(李顯章)은 계축년 문과에 등과한 완산 이씨로 1716년(숙종 42) 3월에 부임하여 1718년(숙종 44) 5월에 퇴임하여 서울로 돌아가자 역리들이 선정비를 세웠다.
[위치]
『김천도역지』에 따르면 찰방이 집무를 보던 김천도역은 지금의 남산공원과 김천초등학교 인근의 남산성결교회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의 찰방 선정비 4기가 위치한 장소는 김천초등학교 운동장 가장자리로, 조선 시대 말까지 김천역으로 들어가는 어귀이자 교통량이 빈번한 대로변인 관계로 이곳에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형태]
4기의 찰방 선정비는 모두 화강암으로 몸돌과 머릿돌이 일체형의 형태를 하고 있다. 신류의 선정비는 높이 120㎝, 너비 38㎝, 이극태의 선정비는 높이 109㎝, 너비 39㎝, 이정억의 선정비는 높이 183㎝, 너비 45㎝, 이현장의 선정비는 높이 130㎝, 너비 30㎝의 규모이다.
[금석문]
4기의 선정비 모두 전면에 찰방 신후유 청간인정비(察訪 申侯留 淸簡仁政碑), 찰방 이후극태 선정비(察訪 李侯克泰 善政碑), 찰방 이후정억 청덕비(察訪 李侯楨億 淸德碑), 찰방 이후현장 선정비(察訪 李侯顯章 善政碑) 등 건립한 연도와 선정비 주인공의 이름을 새겼으며 후면에는 특별한 각자가 없다.
[의의와 평가]
찰방 선정비의 존재는 교통의 요지로서 예부터 김천이 가지고 있는 역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는 상징적인 유물이라 할 수 있다. 김천역은 도로와 시장 발달의 동력으로 작용해 역촌(驛村)의 형성과 문물의 집산을 촉진시켜 김천장을 전국 최대 규모의 시장으로 발전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찰방 선정비에 대한 세심한 연구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