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04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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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一運動 |
영어음역 | Samil Undong |
영어의미역 |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
이칭/별칭 | 기미독립운동,기미운동,3·1만세운동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신순철 |
[정의]
1919년 3월 10일~28일 고창 지역에서 일어난 항일 독립운동.
[역사적 배경]
일본은 1910년 국권을 강탈한 뒤 폭압적인 무단 통치를 실시하였다. 한민족은 무단 통치 아래서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박탈당하였고, 민족 교육과 종교도 탄압받았다. 또한 회사령으로 민족 자본가의 성장이 막히고, 토지 조사 사업으로 많은 농민들이 소작농으로 전락하였으며, 도시의 노동자 또한 일본인 노동자에 비해 크게 차별을 받았다.
그 결과 일본에 대한 분노와 저항이 거세어져 갔고 다양한 형태의 민족 운동이 전개되었다. 국외에서 독립군 기지 건설 운동이 일어났으며, 국내에서는 비밀 결사 운동, 교육 문화 운동, 생존권 수호 투쟁 등을 통해 역량을 키워 나갔다. 1918년 1월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 식민지 처리 과정에서 식민지 국가에 민족 자결주의를 적용하자고 주창하였다. 이 주장은 식민지 약소민족의 민족 해방 운동을 불러일으켰다.
우리나라에서도 1919년 3월 1일 민족 대표 33명이 서울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탑골공원에서는 군중들이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으며, 시위의 맹렬한 불길은 삽시간에 전국 방방곡곡으로 번져 나갔다. 당시 고창 일원에서도 거족적인 민족 독립 운동 소식을 접하고 종교계와 학교의 지도적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 3·1운동을 계획하였다.
[발단]
고창 지역의 만세 운동 계획은 정읍군에 인접한 성내면에서부터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성내면 월산리에 거주하는 청년 이종철(李鍾喆)과 학생 이대성(李大成)·이종주(李鍾株)·유판술(劉判述) 등은 솔선하여 만세 운동에 앞장 설 것을 결의하였다. 선언서 등사·취지서 작성 등 만세 운동 준비를 진행하며, 한편으로 3월 10일 밤에 이종주 집에 비밀히 모여 종이로 다수의 태극기를 만들어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성내면사무소 구내에 공지를 하였다. 선언서와 격려문을 살포하며, 13일에 학교 앞 운동장으로 모이라는 전단지도 살포하였는데, 이 사실이 흥덕면주재소에 알려지고 이종철 등 4명이 일본 경찰에 검속되어 성내면에서의 거사 계획은 좌절되었다.
[경과]
성내면에서의 거사 계획 실패 이후 고창읍에서 서쪽으로 떨어져 있는 지금의 무장면인 무장읍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무장면은 원래 무장군으로 일제 강점기인 1914년에 읍내를 중심으로 한 일부 지역이 고창군으로 편입된 곳으로 읍내에는 지식층과 유지들도 많이 있었다. 그중에도 김영완(金永玩)은 고종 황제 국장을 앞두고 인산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갔다가 3월 1일 만세 운동에 참여하고 곧 고향으로 내려와서 유지 이용욱(李用郁)·김용표(金容杓)·김상수(金相洙)·이준구(李俊久)·김진호(金辰鎬)·박흥선(朴興先)·오태근(吳泰根)·박흥수(朴興洙) 등과 함께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3월 15일 무장읍 장날을 이용하여 거사를 단행하였다.
장꾼들이 많이 모이기를 기다려 이용욱·김용표 등은 미리 등사하였던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며, 김영완은 군중 앞에 나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부르며 군중을 불러 모았다. 이용욱·김응표 등은 다시 태극기를 높이 들고 선두에 서서 군중을 지휘하며 대열을 지어 시위행진을 하였다. 만세의 물결은 남문을 지나 면사무소와 주재소 앞으로 나가며 행진하였는데, 결국은 적 무장대의 폭력 행위로 군중은 해산하고 김영완과 김용우(金容佑)·김두남(金斗南)·김영해(金永海) 등은 검거되었다.
고창읍에서는 3월 21일에 만세 시위가 있었다. 읍내의 김승옥(金升玉)·오동균(吳東均) 등은 「독립선언서」·「국민휘보(國民彙報)」·「조선독립가」 등 문서를 얻어 이를 다수 등사한 후 군내의 유지 및 학생들과 연락하여 3월 19일[음 2월 28일] 고창읍 장날을 기해 일대 시위운동을 일으키기를 계획하였다. 그러나 거사 계획이 일본 경찰에 알려지면서 진행이 여의치 못하였다가, 이튿날 21일에 다시 일부 학생들과 합동하여 오전 11시경 청년·학생 등 100여 명이 모여 만세를 부르며 읍내 거리를 행진하였다.
김승옥이 선두에 서서 독립 운동에 대한 연설을 하고, 오동균은 선언서·조선독립가 등을 배포하며 군중을 격려하여 많은 사람들의 환호를 받았다. 도중에서 일본 경찰대의 저지를 받았으나 군중은 굽히지 않고 더욱 기세를 올리며 군청으로 밀려가서 군수와 군 직원들에게 만세 운동에 참가하도록 강력히 요구하여 형세가 더욱 커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국 일제의 탄압에 의하여 오동균·김승옥·김창규(金昌奎) 등 10여 명이 검속되고 군중은 해산되었다. 25일에도 군내 여러 곳에서 산발적인 만세 운동이 있었으며, 28일에는 다시 흥덕면 흥덕리에서 집집에 태극기가 게양된 사실이 있었는데 일본 경찰에게 태극기는 탈취당하고 학생 3명이 검속되었다.
[결과]
고창군의 만세 운동 관련자 중 김승옥·오동균 등은 광주지방법원 정읍지청에서 1년 6개월과 1년의 징역을 선고받고 불복하여 그해 8월 서울고등법원에 상고였지만 모두 기각되고 말았다. 이외 무장읍 운동의 주동 인물 김영완·김용표는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서대문교도소에서 복역하던 중 옥사하였으며, 성내면의 이종철·이대성·이종주·유판술 학생 등은 1년의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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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의와 평가]
1919년 고창 지역의 3·1운동은 식민 지배에 저항하는 민족 독립 운동으로서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지역민들의 희생과 노력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