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08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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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聖王 |
영어음역 | Seongwang |
영어의미역 | King Seong |
이칭/별칭 | 명,명농,명왕,성명왕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왕족·호족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백제 |
집필자 | 서정석 |
[정의]
삼국시대 백제 제26대 왕.
[가계]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성왕은 무령왕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다. 맏아들이라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성왕은 무령왕의 맏아들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513년 8월 무령왕의 아들 순타태자(淳陀太子)가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왕의 맏아들은 위덕왕인데, 554년에 29세였다고 『일본서기』에 되어 있는 만큼 525년에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활동사항]
성왕(聖王)[재위 523~554]은 무령왕이 523년에 사망하자 뒤를 이어 백제 제26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지혜와 식견이 뛰어나고 일에 결단력이 있으며, 천문 지리에도 통달하여 왕의 이름이 사방에 퍼졌다. 성왕은 동성왕과 무령왕을 뒤이어 왕권 강화를 완성시킴으로써 실질적으로 백제의 중흥을 연 인물이다. 성왕을 백제 중흥의 영주(英主)로 평가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성왕이 이러한 평가를 받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성왕은 수도를 웅진(현재 공주)에서 사비(현재 부여)로 옮겼다. 웅진 천도가 고구려의 남침에 의한 강요된 천도라고 한다면 성왕의 사비 천도는 의도적인 계획 하에 이루어진 준비된 천도였다. 그 만큼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고 있었음을 반증하는 동시에 백제가 웅진시대에 비해 한 단계 비약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백제는 사비 천도와 더불어 제도와 문물이 한 단계 더 발전하였다. 16관등제와 22부제로 대표되는 중앙 통치 조직이 사비 천도와 더불어 완성되었고, 지방 통치 조직 또한 종래의 담로제도를 개편하여 방(方)·군(郡)·성(城) 체제로 완비되었다. 중앙 통치 조직의 완성과 함께 왕도는 5부(部)·5항(巷)으로 편제되기에 이르렀으며, 지방 또한 5방·37군·200성 체제로 정비됨에 따라 귀족들의 발언권은 약화되었고, 왕권 중심의 정치 운영 체제를 확립할 수 있었다.
둘째, 백제의 국제적 지위를 한 단계 향상시켰다. 성왕은 천도와 더불어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로 개칭하였는데, 이는 부여족으로서의 전통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아울러 양나라 및 일본과의 교류를 적극적으로 추진함으로써 백제의 위상을 높였다. 양나라로부터는 모시박사(毛詩博士)·공장(工匠)·화공(畵工) 등을 초빙하고 『열반경』 등을 수입함으로써 백제 문화의 질적 수준을 한 단계 발전시켰고, 이를 이웃한 일본에 전해줌으로써 일본에 대한 선진 문물의 전수자 노릇을 톡톡히 하였다.
일찍이 성왕은 인도에서 산스크리트어로 된 『5부율(五部律)』을 가지고 온 겸익(謙益)을 우대하고, 고승들을 모아 『5부율』을 번역하도록 하였다. 나중에는 손수 그 서문을 쓰기도 하였는데, 호불군주(好佛君主)로서의 모습을 살필 수 있는 대목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성왕은 노리사치계 등을 일본에 보내 불교를 전파하였다. 물론 불교 뿐만 아니라 의박사·역박사 등의 전문가와 기술자도 파견함으로써 문화 선진국으로의 위상을 강화하였다.
셋째, 영토 확장을 꾀하였다는 사실이다. 성왕은 그 이전부터 진행되어 오던 신라와의 동맹 관계를 그대로 지속함으로써 고구려의 남진 압력에 대항해 나갔다. 그리고는 마침내 필생의 소원이라고 할 수 있는 한강 유역의 탈환 작업에 나섰다. 그 결과 백제는 한강 하류의 6개 군(郡)을 차지하고, 신라는 한강 상류의 10개 군을 차지함으로써 한강 유역을 되찾을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성공은 일시적인 것이었고, 동맹국이었던 신라의 배신으로 차지하고 있던 한강 하류의 땅을 모조리 신라에 빼앗기는 처지가 되고 말았지만 한강 유역의 탈환만큼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이렇게 특기할 만한 업적을 남긴 성왕이었지만 신라의 배신으로 실지(失地) 회복의 꿈이 수포로 돌아가자 여러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라에 보복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여기에는 가야의 군대도 포함되어 있었다.
백제와 신라의 전투는 관산성(管山城)에서 절정을 이루었는데, 전투 초기에는 백제가 우세를 보였지만 성왕이 구천(狗川)에서 신라 복병의 기습을 받아 전사함으로써 전세는 역전되고 말았다.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는 성왕을 비롯하여 4명의 좌평과 3만 명에 달하는 군사들이 거의 전멸하였다.
관산성 전투에서의 패배는 백제에게 회복할 수 없을 정도의 타격을 안겨 주었다. 이제 한강 유역의 땅은 신라 소유가 기정사실화 되었으며,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왕 자신이 참전하였다가 패배한 만큼 왕권 중심의 정치 체제가 귀족 중심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동성왕 이후 무령왕을 거쳐 성왕 때까지 추진해 왔던 왕권 강화의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만 셈이다. 당연히 나제동맹은 결렬되고, 이후 백제와 신라는 끊임없이 보복전을 반복해야만 했다.
[묘소]
성왕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전혀 없다. 따라서 어디에 있는지조차 짐작하기 어렵다. 다만 성왕의 넋을 위로하는 능사(陵寺)가 충청남도 부여군 능산리 고분군 근처에 있는 만큼 능산리 고분군 안에 성왕의 무덤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현재 능산리 고분군에는 3기씩 남북으로 2열의 고분군이 자리하고 있고, 여기에서 얼마간 거리를 두고 또 하나의 고분이 있어 모두 7기가 자리하고 있다. 그중 능산리 2호분은 무덤의 구조가 무령왕릉과 흡사하고, 단지 축조 재료가 벽돌과 판석이라는 차이점만 있는 것으로 볼 때 능산리 고분군 중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능산리 2호분이 성왕의 무덤일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