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09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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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盧璛 |
영어음역 | No Suk |
영어의미역 | No Suk |
이칭/별칭 | 문백,관류당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동곡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해준 |
성격 | 충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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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동곡리 |
성별 | 남 |
생년 | 1587년 |
몰년 | 1655년 |
본관 | 만경 |
대표관직 | 오위도총부부총관 |
[정의]
조선 중기 충청남도 공주 출신의 충신.
[가계]
본관은 만경(萬頃). 자는 문백(文伯), 호는 관류당(觀流堂)이다.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당시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노응환(盧應晥)[1555~1592]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활동사항]
노숙(盧璛)[1587~1655]은 1624년(인조 2) 인조가 이괄(李适)의 난(亂)을 피하여 공산성 쌍수정에 파천하여 있을 때, 군량미 300석을 상납하여 왕과 군사들이 굶주리지 않게 하였다. 이에 왕이 포상의 의미로 소원을 묻자 벼슬을 마다하고 단지 공자(孔子)를 모시고 싶다고 하였다고 전한다. 이에 왕은 노숙의 충절을 가상히 여겨 오위도총부부총관을 제수(除授)하고 금배와 옥저를 하사하였다.
후손들에 의하면, 왕이 노숙의 충절을 가상히 여겨 벼슬을 주어 부르려 하였으나 노숙이 늙은 노모를 핑계로 끝까지 나가지 않고 대신에 백성들의 세금을 면제해 줄 것을 청하였다고 한다. 이에 왕은 크게 감복하여 “그대는 진실로 농민들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다(汝眞歡農人也)”라고 하였다고 한다. 또 노숙이 살았던 현 우성면 동곡리를 조왕동(助王洞)[일명 조왕곡]이라고 하였으며, 노숙이 왕에게 바칠 군량미 300석을 모아 놓았던 곳을 군량골이라고 한다.
[상훈과 추모]
정려(旌閭)는 1864년(고종 1) 충청도감사가 노숙의 충(忠)의 사적을 조정에 상신한 5년 후인 1869년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