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20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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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佳橋里山神祭-祭 |
영어의미역 | Religious Service for the Mountain God and Ancestral Memorial Services of Gagyo1-ri |
분야 |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
유형 | 의례/제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가교리 |
집필자 | 구중회 |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가교리에서 올리는 산신제와 여제(厲祭).
[개설]
가교리의 산신제는 매년 음력 정월 초승과 팔월 말에 길일을 잡아 지내는 마을 제사이다. 제일이 결정되면 제관, 축관, 제주(일명 화주)를 선정한다. 제물은 고기(생 것), 떡, 과일 등을 마련하여 올린다. 가교리의 거리제는 매년 음력 정월 보름날 동네 어귀에서 지낸다. 제물은 떡, 과일 등으로 비교적 간소하게 올린다. 노신제에는 풍장을 울리는 등 산신제에 비하여 흥겨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다.
[신당/신체의 형태]
가교리에는 세 가지 신체가 있다. 산신당에 산신과 성황신을 모신 두 신체가 그 하나이고, 그 다음이 ‘돗대’이고, 나머지가 여묘이다. 산신당은 산에 있고, ‘돗대’는 마을 한가운데 장대 모양을 하고 있고, 여묘는 말 그대로 묘의 형태로 현재 가교리 교회 앞에 위치해 있다.
[산신제 구조의 특이성]
가교리의 산신제는 공주의 여느 지역과 다르다. 보통 공주 지역은 산신제를 모시는 권역이다. 그런데 가교리의 산제당의 신위는 산신신위와 성황신위가 같이 모셔져 있다. 이러한 현상은 특이한 것이다. 성황신은 우리나라 국토의 동해안과 관계가 깊다. 그 대표적인 것이 강릉 단오제이다. 산신제와 성황제의 신체와 신격은 다르다. 그런데 이들 두 신체와 신격이 만난 것이다. 두 신체와 신격의 만남은 우리나라 민간신앙의 산신제권과 성황제권의 중간 지역이 가교리이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그것도 산신보다 성황신을 먼저 지칭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산신제 축문에 의하면, 성황과 산신의 영신(靈神)은 이웃 마을을 돌보기 때문에 의지하는 바가 있어서 교외의 제사로 모시게 되었다. 제사는 정기적으로 모시기도 하지만 날짜를 받아 임시로 모시기도 했다. 재앙을 소제하고 복록을 받으며, 풍년이 들고, 마을 사람들이 편안하여 길상이 있으며, 호랑이와 이리와 여역의 근심을 없애니 마을의 가축들이 번성한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중요 명산은 대개 국가적으로 거행케 되는 산악제의 대상이었다. 유홍렬의 「조선의 산토신 숭배에 대한 소고」에 의하면, 각 주·부·군·현에는 각각 1개 이상의 성황신을 위한 단묘가 있었다. 그리고 각 지방관으로 하여금 연 2~3차식 봉사하게 하는 국행제전의 처가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방방곡곡의 고개와 봉오리에 흩어져 있는 산신당과 성황당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다. 조선 중기인 1530년(중종 25)에 증보 정정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충청도에는 성황사 54곳, 산신사 5곳이 있었다. 조선시대 500년의 역사로 볼 때, 가교리의 이런 산신제는 다소 특이한 형태인 것이다.
[가교리 성황신에 대한 가설]
고사는 각 개인의 복과 장수를 비는 것이고, 산신제[都堂祭]는 한 마을의 안녕과 태평을 비는 것이다. 그러나 고사도 마을 단위로 올리는 경우가 있고, 산신제도 개인 단위로 올리는 경우가 있다. 산신제는 산악숭배에서 빚어진, 지극히 원시적인 자연숭배의 일부분이다.
산은 각 마을의 거주지와 생산 소득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즉 산은 동·식물, 금석 등의 소산지로 주민에게 ‘산의 행복’이라는 경제적 편리를 준다. 더욱이 천계의 용출로 수리의 편리를 주기도 한다. 그러나 산악은 장엄준험할 뿐만 아니라 맹수독사 등의 피해를 주기 때문에 주민에게 생활상 방어와 공포의 심리도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연유로 산신제라는 종교적 제의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이다.
성황제(城隍祭)의 성황은 원래 성지(城池)와 동의어이다. 성황신은 읍성 내 지역을 차지(次知)하는 신이다. 그러므로 성황제는 읍성내의 안행(安行)을 축원하는 제의이다. 성황신은 원래 인도의 조신(祖神), 즉 산토신(産土神)으로서 남중국을 거쳐 북진하여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에 암석 숭배와 도로 수호신과 주의 태공망(太公望)[주나라 정치가, 속칭 강태공]의 전처의 전설이 부합되었다는 일설도 있다.
중국에서 성황신이 봉사케 된 것은 제요(帝堯)가 사팔신(蜡八神)이었기 때문이다. 가교리의 산신제는 이런 점에서 성황제가 덧붙여진 산신제라 할 것이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내용은 가교리 산신제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임란(壬亂)의 대란(大亂)을 겪고 난 1599년(선조 32) 5월에는 중로관량위관경력(中路管粮危官經歷) 오도행(吳道行)이 상계(上啓)하야 국가위급지시(國家危急之時)에 제(際)하야는 천지산천신(天地山川神)을 제(祭)하는 외(外)에 모름지기 지정지령(至正至靈)한 성황토지신(城隍土地神)을 제(祭)할 것을 논(論)하야…….”
위의 인용문에서 보면 산신제에 성황이 개입된 것은 임란 이후로 볼 수 있다. 공주의 ‘명국삼장비(明國三將碑)’에서 보는 것처럼 군사신인 성황의 신앙에서 빚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중국의 군신인 관우에 대하여 임란 이후 서울에 사우를 짓도록 한 명나라 조치를 음미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로 본다면 가교리 산신제의 산신과 성황신의 병치는 임진왜란 이후일 가능성이 높다.
[여제(厲祭)]
음력 정월 15일 저녁 여묘(厲墓) 앞에서 생기복덕을 살펴서 선발된 제관, 축관, 화주 등이 참여하여 유가식으로 지낸다. 떡은 1시루를 하며, 3말을 쓴다. 공주의 다른 마을에서는 떡 시루에 3말 3되 3홉의 쌀을 사용한다. 3말로 하는 것은 나름대로 특징이 아닐 수 없다. 제의 절차는 강신→분향→초헌→독축→아헌→종헌→소지→음복→분축 등이다. 진설은 일반 제의와 같이 주과포와 돼지나 소머리와 불발기 등을 올린다.
마을에서는 노신제(路神祭)로 지내다가 몇 해 전부터 여제로 봉사(奉祀)하고 있다. 여제란 제사를 받지 못하는 귀신, 즉 무사귀신(無祀鬼神)들에게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이들 귀신들이 제사를 받지 못하는 원통함 때문에 분한을 품고 흩어지지 않으므로 이들의 원기(冤氣)가 쌓여서 역질(疫疾)이 생기고 화기(禍機)가 해쳐 변괴를 낳는다는 민간신앙 때문이다.
이 의례는 『홍무예제(洪武禮制)』에 의거한 것이다. 이는 1401년(태종 원년)에 권근(權近)[1352~1409] 등에 의해 1404(태종 4)에 여제가 상정(詳定)되었다. 제사 날은 청명일과 7월 15일 그리고 10월 1일 세 차례였다. 제단은 성북(城北)의 교간(郊間)에 위치했다. 제물로는 경중의 경우 양 3마리와 돼지 3마리였고, 외방의 경우 지관(知官) 이상은 경중보다 1/3, 그 이하는 지관 이상보다 1/2를 감했다. 아울러 주제관은 경중의 경우 개성유후사(開城留後司) 당상관이나 한성부 당상관으로, 외방의 경우 각 고을의 수령이었다.
여제의 신위(神位)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의하면, 15종의 원혼(冤魂)이 이에 해당한다. 그 배치는 다음과 같다. 왼쪽은 6종인데, ① 전쟁에서 병사와 병기로 인하여 죽은 사람(遭兵刃死者), ② 수재·화재와 도적에게 죽은 사람(遇水火盜賊死者), ③ 재산을 취하다가 핍박을 받아 죽은 사람(被人取財物逼死者), ④ 처첩을 강탈당하여 죽은 사람(被人强奪妻妾死者), ⑤ 형과 화로 인하여 죽은 사람(遭刑禍負屈死者), ⑥ 천재와 질병으로 인하여 죽은 사람(因天災疾疫死者) 등이다.
오른쪽은 9종인데 ① 맹수와 독충에 인하여 죽은 사람(爲猛獸毒蟲所害死者), ② 얼거나 굶어서 죽은 사람(凍餒死者), ③ 전투로 죽은 사람(戰鬪死者), ④ 위급하여 목을 매어 죽은 사람(因危急自縊死者), ⑤ 담이나 집에 깔려 죽은 사람(被墻屋壓死者), ⑥ 난산으로 죽은 사람(難産死者), ⑦ 벼락에 맞아 죽은 사람(震死者), ⑧ 어디에서 떨어져서 죽은 사람(墮死者), ⑨ 후손 없이 죽은 사람(沒而無後者) 등이었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주로 왼쪽은 인재(人災)와 관련되고, 오른쪽은 천재(天災)와 관련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의 15종의 원혼은 원래 12종이었던 것을 오른쪽의 ⑥, ⑦, ⑧ 등이 1444년(세종 26)에 보강된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난산으로 죽는 사람과 벼락을 맞아 죽는 사람과 어떤 연유로든 떨어져 죽는 사람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고려의 강감찬 장군이 큰 벼락을 분질러 없앴다는 전설을 상기할 때, 벼락의 피해가 컸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들 여제가 실제로는 잘 지켜지지 않아 1472년(성종 3)에 신위판을 다시 지시하고 있다.
여제의 제의 절차는 그 제단이 독립되어 설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타 제사와 다르게 성황에서의 발고(發告)와 북교(北郊)에서의 행제(行祭) 등 두 단계로 구분되어 치제했다. 이 원칙은 1414년(태종 14) 때의 ‘여제발고제법(厲祭發告祭法)’에서부터였다.
가교리의 여제는 거의 알려진 바 없다. 몇 해 전 필자가 현장 조사를 하다가 축문을 보고 ‘여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제라고 지목하는 것은 축문에 나타난 ‘대여지신(大厲之神)’이란 신위의 명호가 그렇고, 가교리가 공주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교리의 여묘는 공주의 북교였던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가교리가 마곡사의 주변촌이라는 것이다.
1453년(단종 원년)에 황해도 황주 사람들이 이전에 역질이 성행할 때 수륙제(水陸祭)를 시행하여 효과를 본 일이 있었으므로 이를 상설화하자는 주청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서는 숭유억불 정책을 시행하던 시기로 승려들이 관장하는 수륙제를 금지시켰다. 그 대신 춘추에 여제를 시행시켰다고 한다. 이런 정황을 종합하면 가교리의 여제는 조선조에서 마곡사를 견제하기 위하여 마련한 여단이라고도 할 수 있다. 현재는 묘만 남아 있으나 당시에는 사묘(祠廟)가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여묘에 묻힌 사람과 당시 인구 현황]
그렇다면 가교리 여묘에 묻혀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의하면, 임진년 이듬해인 1593년에 이산겸(李山謙)이 마곡사에서 25명 정도의 군사를 해산하면서 충청감사에게 군량과 군기를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충청감사의 명에 의하여 마곡사에 진지를 결성하였으며, 11월에 상소하고 군사를 해산하면서 군량과 군기를 감사에게 바쳤다는 것이다. 아마 마곡사에 승군을 두었던 것은 아닐까. 갑사의 영규대사를 생각해도 그렇고, 휴정인 서산대사가 승과 1기생으로 당시 승군을 일으켜 크게 활약한 것을 생각해 봐도 그렇다. 『여지도서(輿地圖書)』(1759~1765)에 나타난 가교리 주위, 즉 사곡면의 인구는 다음과 같다. --로 표시된 인구는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영조~헌종)의 것이다.
양지리(陽地里) 서30리(34호 남 80명 여 215명)--43, 80, 39
원당리(元堂里) 서30리(54호 남 100명 여 111명)--58, 108, 58
명가동리(明佳洞里) 서35리(28호 남 52명 여 107명)--38, 62, 38(*『공산지』는 서30리임)
연종리(連宗里) 서35리(28호 남 52명 여 92명)--38, 62, 31
세동리(細洞里) 서40리(60호 남 27명 여 31명)--62, 113, 63
마곡리(麻谷里) 서40리(27호 남 31명 여 92명)--27, 41, 29
무교리(舞橋里) 서40리(29호 남 57명 여 49명)--40, 79, 39
해월리(蟹越里) 서35리(48호 남 77명 여 95명)--46, 97, 53
도강리(道江里) 서35리(24호 남 26호 여 55명)--34, 66, 34
『호구총수(戶口總數)』(1789년)에 사곡면은 38리이고, 원호는 595호이며, 인구는 1,987명(남 1346명, 여 641명)이다. 이명(里名)은 산소리, 원당리, 명가동, 유치리, 학소동, 도강리, 송회동, 화암리, 무교, 안영동, 장척리, 어목리, 부곡리, 세동, 은현리, 약산리, 월은리, 주막리, 대시, 랑평리, 호계리, 율정리, 운정리, 고단평, 해월리, 구수동, 항동, 점촌, 동양동, 연종리, 가회동, 탄동, 본목리, 명당동 산막리, 용교리, 도덕동, 율리 등이다. 이런 인구 현황은 임진왜란과 200여년 차이가 나지만 당시의 인구 정황을 알 수 있다. 이들이 승군에 참석하여 죽은 것은 아닐까. 질병으로 죽었는지도 모른다. 하여튼 앞으로의 추적이 요구되는 대목이라 할 것이다.
[축문]
1) 산신제 축문
維歲次 干支幾月干支朔日干支幼學 敢昭告于
言念城隍山神之靈神 顧此隣里之依 仰推郊祀 天地之禮 陰騭下民 禮望秩山川之儀 類于上帝 時維隨時日 又辰 茅茨臨高 共仰明神之 在上峩冠咸集 各盡誠敬之由中 牲酒載陳 敢冀至誠之能感 粢誠克潔 庶格明德之 惟馨請祝 消災之方 黙禱遐福之美 占豊穰康寧之 祰之百祥 祛虎狼癘疫之憂 安此八班 願旣齊未齊之事 咸助神休 雖大畜小畜之微 隨時蕃殖 尙 饗
2) 여제 축문
維歲次 干支幾月干支朔日干支幼學 敢昭告于
大厲之神 坱圠爽郞 灝氣蟠極 神明宣化 民物就殖 凡托燾載 孰非神力 運惑相揜 恪有難測 善媛攸屬 蠢未知識 小大競業 不敢寧息 年詢遵儀 迺壝而域 敬揀吉辰 載薦悃愊 靈其降歆 俾民除慝 萬歲千秋 均蒙大德 尙 饗
[현황]
가교리는 문화적으로, 보다 적확하게는 민간신앙적 입장에서 특이한 곳이다. 우리나라의 산신과 성황신이 만나는 곳이고, 절(마곡사)과 충청관아 즉 유가의례가 만나던 곳이다. 물로 인한 피해가 커서 행주형 풍수신앙이 아직까지도 현존하는 곳이다. 이러한 문화적 유산은 민속자료로 보존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교회가 전통문화와 갈등을 일으키는 다른 마을과 달리 친화력을 가진다는 점에서도 보존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