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20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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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山城洞山神祭 |
영어의미역 | Religious Service for the Mountain God, Sanseong-dong |
분야 |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
유형 | 의례/제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산성동 |
집필자 | 조훈성 |
성격 | 산신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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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시기/일시 | 음력 1월 14일|음력 1월 4일~15일 중에 택일 |
의례장소 | 충청남도 공주시 산성동 영명사 |
신당/신체 | 영명사|제구|산신도 |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 산성동 영명사에서 정월 열 나흗날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고자 지내는 마을 제사.
[개설]
공주시 산성동은 조선 말기에 공주군 동부면 지역이었다가,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에 관현 일부와 남부면의 허문리 일부를 병합하여 쌍수산성의 이름을 따서 일본식으로 산성정이라 하여 공주면에 편입되었다. 1947년 일본식 동명을 우리말로 개명하여 산성동으로 고쳤으며, 1986년 공주시로 승격함에 따라서 공주시 산성동이 되었다.
산성동의 산신당은 원래 공산성 안의 진나루 동쪽에 있었다. 하지만, 산신당 건물이 오래되고 낡아서 공산성 앞에 자리한 영명사로 옮겨서 산신제를 치르게 되었다. 산성동 산신제는 산성동 대동계에서 주관하는데, 제관은 제주와 축관을 포함하여 6~7명이 참여한다.
[연원 및 변천]
산성동 산신제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며, 산신제를 지내는 날짜와 시간은 매년 음력 1월 14일 밤에 산성동 산신제를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산성동 산신제가 꼭 음력 1월 14일로 꼭 정해진 것은 아니다.
기록에 따르면 1990년에는 2월 4일, 1991년에 1월 20일, 1992년에는 1월 14일에 산신제를 지냈는데, 1986년에는 3월 25일에 지내기도 하였다. 이처럼 부득이한 일이 있는 경우에는 정월초사흗날에서 보름 사이에 길일을 잡아서 산신제를 지내기도 하며, 부정이 있을 때는 제일(祭日)이 미뤄지기도 하였다.
[신당/신체의 형태]
과거 산신당에 있던 제구(祭具)와 산신, 토지 대사, 복신 장군의 그림 세 점이 영명사로 옮겨졌고, 또한 당집 안에 모셨던 마을 조상의 이름과 명세서를 적은 위패들도 절 한편의 사당으로 옮겨서 보관하고 있다.
[절차]
산신제를 치르기 며칠 전에 당산나무가 서 있는 제장에 왼 새끼로 꼰 인줄을 쳐서 성역임을 표시한다. 산신제를 주관하는 대동계에서는 회의를 열어 제주와 축관을 선출한다. 간혹 제주를 선출하는 대신 무당을 불러 매 굿(일명 매귀(埋鬼)라고도 하며 주로 농촌에서 음력 정초에 풍물패가 풍물을 치면서 마을을 돈 다음 집집이 들어가 악귀를 쫓고 복을 빔)을 하기도 한다. 이때는 풍물패는 마을을 돌며 지신밟기나 무당이 매 굿을 한다.
각각의 탈을 쓴 사람들은 집집이 돌며 지신풀이를 하는데, 이를 ‘매귀놀이’ 또는 ‘매구놀이’라고 한다. 산신제의 비용은 이렇게 풍물패가 돌아다니며 걸립하는 것으로 충당했지만, 최근에는 공주시에서 지급하는 보조금을 보태어 사용한다. 제물은 소 혹은 돼지머리, 백설기, 술, 과일, 포, 메, 미역국, 나물 등을 장만한다.
산신제를 치를 때에는 ‘산성왕대신신위(山城王大神神位)’라고 쓴 지방을 놓는다. 제의 순서는 분향(焚香)으로 향을 먼저 태운다. 그 다음은 강신(降神)으로 제사 때, 초헌하기 전에 먼저 신이 내리게 하는 뜻으로, 향을 피우고 술을 잔에 따라 모사(茅沙) 위에 붓는다.
그 후 참신(參神)으로 신주에 절을 하고, 초헌(初獻)으로 첫 술을 신위에 올린다. 그 다음 독축(讀祝)으로 축문을 읽고, 아헌(亞獻)으로 두 번째 잔을 신위에 올린다. 그 다음 종헌(終獻)으로 세 번째 잔을 올린 후, 소지(燒紙)를 하며 제사를 지내고 나서 신을 보내는 사신(辭神)을 한다. 그 후 독축자(讀祝者)가 지방과 축문을 태워 재를 향로에 담는 분축(焚祝)을 끝내고 음복으로 제사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이처럼 산성동 산신제는 일반적인 유교식 제의로 치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