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05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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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群山鐵道勞動會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원기 |
설립 시기/일시 | 1924년 5월 26일 - 군산철도노동회 설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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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 시기/일시 | 1931년 3월 - 군산철도노동회 해체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25년 1월 8일 - 군산철도노동회 제2차 정기 총회 개최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24년 12월 17일 - 군산철도노동회 운영 방안 모색을 위한 긴급 총회 개최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25년 10월 27일 - 군산철도노동회 경비 판출 방침 확정 |
파업 시기/일시 | 1925년 12월 25일 - 군산철도노동회 파업 |
성격 | 노동 운동 단체 |
설립자 | 박용|이동화|김영휘|김희영 |
[정의]
1924년 5월 26일 전라북도 군산 지역에서 설립된 철도 노동자 중심의 노동 단체.
[개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은 자본 축적을 위한 기반 시설을 마련하였다. 한국 각 지역에 식민지 공장을 비롯한 기반 시설들이 갖추어 지면서 임금 노동자와 공장 노동자가 증가하게 되었다. 식민지 기반 시설 구축에 따른 도시의 발전과 물자의 집산과 운반 등이 새로운 노동 수요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새로운 노동 수요는 부두·항만·철도역을 중심으로 운수·운반에 종사하는 노동자층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후 사회주의 영향과 노동 문제에 관심을 갖는 지식인의 등장으로 전국 각지에서 노동회·노우회·노동 친목회·노동조합 등의 노동 단체들이 설립되었다. 이런 노동 단체들은 일제에 맞서 민족 간 임금 문제와 노동자들의 권익 확보를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1920년대 한국의 전반적 상황은 군산에서도 관찰되었다. 군산항은 미곡의 대일 수출항으로서 식량 공급 기지로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일제 자본가들은 군산에서 경제적 이윤확보를 위해 공장 신설과 기업을 설립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로 인해 군산에서는 정미와 양조를 중심으로 제조업이 발달하게 되었고, 농촌에서 유리된 노동력들이 부두·항만·철도역에 모여들게 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각 개별의 노동자들은 일제 자본가들의 차별과 핍박에 시달려야 했다. 이런 점을 개선하기 위해 사회주의 지식인을 중심으로 노동 단체가 결성되기 시작하였고, 이 과정에서 군산철도노동회도 설립되었다. 설립 이후 군산철도노동회는 민족 간 임금 차별 문제와 노동자의 권리 확보를 위한 투쟁을 전개하여 일정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지도부가 해체되는 등 활동에 제약을 받게 되면서 해체에 이르게 되었다.
[설립 목적]
군산 지역 철도 운수 단체인 철운 조합(鐵運組合)과 운수 조합(運輸組合)의 반목을 해결하고 철도 노동 단체의 화합과 철도 노동자들의 노동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변천]
군산 지역 철도 운수 단체로는 박용(朴湧)을 위원장으로하는 철운 조합(鐵運組合)과 이동화(李東和)를 중심으로 한 운수 조합(運輸組合)이 있었다. 두 단체는 서로 비슷한 성격의 단체였지만 협동보다는 반목을 일삼아 왔다. 이에 대동 단결의 필요성을 느끼고 김영휘(金永輝)·김희영(金煕暎)이 중심이 되어 두 단체를 합병시키는 노력을 기울인 결과 군산철도노동회(群山鐵道勞動會)가 창립되었다.
창립 이후 군산철도노동회는 회원들의 자각과 각성을 위한 강연회 활동과 군산철도노동회 운영을 위한 단연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동시에 일제 자본가들의 한국인 철도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적인 처우를 해결하고자 동맹 파업의 방법을 동원하여 단결된 모습을 보였다. 그렇지만 군산철도노동회의 이런 모습을 일제는 견제하고자 하였다. 지도부 대표적 인물들에 대한 감시와 견제, 각 종 회의의 간섭과 무산 시도가 이루어졌고, 결국에는 강제로 해산을 시도하여 성공하기에 이르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군산철도노동회는 일제 자본가들로부터 노동자들의 권익 확보와 사회 주의 사상을 보급하기 위한 강연회 등을 개최하였다.
노동자의 권익확보를 위해 1925년 12월 25일 노임 문제(勞賃問題)로 문제가 발생했을 때 파업을 실시하여 운송업자들에게 요구 사항을 관철시켰다. 원산 총 파업 때에는 회원들이 모은 동정금을 보내 파업이 지속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사회주의 사상을 보급하기 위해서 공동 작업, 평등 분배 실현을 위한 활동을 보였다. 1925년 4월 21일 발생했던 예천 형평 분사 피습 사건(醴泉衡平分社 被襲事件) 때에는 일반 민중들의 무산 대중 해방 운동(無産大衆解放運動)과 형평 운동(衡平運動)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1926년 6월에는 조선 사회 단체 중앙 협의회에 가입하였다.
이 외에 관북 지역에 수재민이 발생했을 때는 금연과 금식을 통해 모금한 회원들의 성금을 의연금으로 전달하였다.
[현황]
1924년 5월 26일 창립 총회 당시 군산 철도 노동회의 간부진은 집행 위원에 박용, 김희영, 이동화, 노영섭(盧永燮), 권중기(權重祺)로 구성되었다. 1925년 1월 8일 2차 정기 총회에서는 집행 위원장 조용관, 집행 위원 이동화, 김탁, 권중기, 김명선, 방수봉, 최일춘이 선임되어 간부진을 구성하였다. 이를 통해 보면 군산철도노동회는 집행 위원을 중심한 운영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집행 위원들은 정기·임시·긴급 총회를 통해 의견을 논의하고, 확정된 의견을 바탕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집행 위원들은 매달 40여 원의 급여를 받았다.
군산철도노동회의 정확한 회원 숫자는 알 수 없다. 다만 군산철도노동회 회원들의 주요 작업장이 하역과 운반이었던 점과 파업 및 화물 운반 문제로 구속되었던 회원과 관련된 당시 신문 기사를 보면 100명 이상의 회원을 두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회원들은 철도 노동회의 운영을 위해 일정액의 금액을 납부하거나 금연 등의 활동을 통해 절약한 돈을 납부하였다. 가입 회원이 병으로 인해 일정 기간 작업을 할 수 없을 경우에는 경제적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의의와 평가]
군산철도노동회는 직업별 노동조합 성격의 단체이다. 이는 이전의 지역별 노동조합에서 발전한 것으로 노동자들의 근로 조건과 노동 문제를 현실적인 면에서 접근할 수 있게 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군산철도노동회 활동의 중심에는 군산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사회 주의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노동자와의 접촉을 통해 군산 지역 노동 운동의 활성화를 도모함과 동시에 일제 자본가들의 차별에 대한 투쟁을 통해 노동 운동을 민족 운동으로 전개시켜 나갔다. 이는 일제 강점기라는 상황에서 민족 독립을 위한 투쟁의 한 방법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