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0474 |
---|---|
한자 | 日帝强占期 |
이칭/별칭 | 일제 시대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
집필자 | 정원기 |
[정의]
1910년(융희 4)부터 1945년까지 전라북도 군산·옥구 지역의 역사.
[개설]
조일 수호 조규(朝日修好條規) 이후 한국에 대한 침략을 가시화한 일제는 러일 전쟁을 통해 한국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고 이어 을사 늑약을 체결 후 통감부를 설치하였다. 이후 일제는 한국 군대 해산, 사법권 장악을 통해 한국에 대한 식민지화를 진행하였다. 의병에 대한 강제 진압을 완료하고 1910년(융희 4) 8월 29일 한국을 강제 병합하여 식민 통치를 시작하였다.
한국에 대한 식민 통치를 시작한 일제는 기존의 통감부를 대신하여 조선 총독부를 세우고, 지방 제도 개편을 통해 일원적인 식민 통치 체제를 갖추었다. 이후 해방 때까지 일제는 여러 제반 정책을 실행하며 한국인에 대한 탄압과 함께 경제적 수탈을 실행해 나갔다.
일제의 통치는 군산 지역에도 그대로 투영되었다. 특히 군산은 조선 시대부터 배후에 넓은 평야와 좋은 운송 조건으로 인해 일제강점기 동안 미곡 수탈지로 이용되었다. 이에 군산 지역 한국인들의 삶은 힘들었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행정 구역 개편과 군산부·군산부 협의회 설치]
조선 총독부는 1914년 4월 1일 부(府) 설치와 군·면·동·리의 통폐합이 내용이 담긴 행정 구역 개편을 실행하였다. 군산에는 군산부가 설치되었고, 옥구군은 주변의 임피군을 병합하고 익산군·함열군 일부와 부안의 비응도, 충청남도의 어청도 등을 편입하였다. 1917년에는 면제(面制)가 실시되어 옥구군의 주요 면이 통폐합되었다. 1932년에는 옥구군 미면 일부와 개정면이 군산부에 편입되는 개편이 있었다.
일제가 지방 제도 개편을 통해 군산부를 설치한 이유는 이전 군산 거류민단의 자치권 요구 수용의 필요성 및 한국인들과 차별성을 두기 위함이었다. 옥구에서 군·면 통폐합을 실행한 이유는 이 지역을 식민 지배 하는데 있어 필요한 재정적 기반과 인적 자원을 확보함이 목적이었다. 동시에 자율성을 갖고 운영되었던 한국 지방 사회의 자치적 발전을 차단하고 조선 총독부의 일원적 지배 체제 아래 속하게 하는 목적이 있었다.
군산부에서는 일본인 교육을 제외한 일반 사무를 처리하였다. 군산부의 주요 업무는 서무·내무·증명·재정 4계로 분장되었다. 서무계는 서무와 회계, 내무계는 민단 및 부면의 감독, 증명계는 부동산 증명, 재무계는 국세, 지방세 징수 및 이재(理財)에 관한 것을 담당하였다. 일본인 교육을 위해서는 학교 조합이 별도로 설치되었다.
한편 군산 부윤(群山府尹)을 보좌할 목적으로 군산부 협의회(群山府協議會)[1931년 4월 군산부회로 개칭]가 1914년 4월 7일 설립되었다. 설립 당시 군산부 협의회의 정원은 8명 이었고 1920년 개정을 통해 20명이 되었다. 인적 구성은 한국인과 일본인이 반반 선출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일본인이 다수를 점한 가운데 부협의회를 주도하였고, 참여했던 한국인들도 일제의 식민정책에 동조하는 친일 성향의 인물들이 다수를 이루었다.
[사회 간접 시설 확충]
일제는 군산부 설립을 전후하여 도로, 철도, 항만, 병원, 관공서 등 사회 간접 시설을 확충해 나갔다. 전주-익산-군산을 잇는 전군 가도(全群街道)가 개통되었고, 충청도 서천, 보령, 대전까지 도달할 수 있는 도로 시설이 마련되었다. 또한 호남선, 군산선, 경부선, 경전북선(慶全北線) 등 철도 노선을 이용하여 각지에 빠른 시간에 도달할 수 있었다. 대판상선(大阪商船), 조선우선(朝鮮郵船)에서 개설한 정기 항로·비정기 항로를 이용해 일본의 게이힌[京濱]·한신[阪神]·나가사키[長崎]와 중국의 대련(大連)·상해(上海) 항구를 이용할 수 있었다. 1915년에는 전라북도에서 최초로 수도 사업(水道事業)을 실시하여 일본인을 대상으로 급수를 실시하였고, 1921년에는 군산 자혜 의원(群山慈惠醫院)이 개소되어 진료를 시작하였다.
위와 같은 사회 간접 시설의 확충과 함께 넓은 평야라는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있던 군산에 이주하는 일본인과 한국인의 수가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인구의 증가와 함께 상권도 확대되어 갔다. 1920년대 군산의 상업 구역은 전라북도 일원은 물론이고 충청북도, 충청남도, 전라남도, 경기도 일부까지 포함하는 큰 상권을 형성하였다. 상권이 확장됨에 따라 상업 활동을 보조하기 위해 조선 은행·조선 식산 은행(朝鮮殖産銀行)·십팔 은행(十八銀行)·조선 상업 은행의 군산 지점, 군산 금융 조합 등이 설립되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군산에서 건립된 사회 간접 시설과 그에 따른 상권 확대는 한국인보다는 일제와 일본인 자본가들의 경제적 이윤 획득을 목적으로 실행된 결과물들이다. 군산 주변에서 생산된 미곡을 보다 빠르게 군산항으로 이송하기 위해 철도와 도로가 개설되었고, 집산된 미곡을 일본과 중국으로 이송하기 위해 항로가 개설되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자본을 대여하기 위해 은행들이 설립되었다. 그리고 군산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정주와 생활 편리를 위해 병원, 하수도, 학교 같은 시설들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군산 지역 교육 기관]
군산에 정착하기 시작한 일본인들은 아이들 교육을 위해 학교를 건립하고 운영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1899년(광무 3) 아사야마 겐죠[淺山顯藏]의 부인이 세운 군산 공립 심상 고등 소학교(群山公立尋常高等小學校)를 시작으로, 1911년 군산 공립 보통 학교, 1912년 군산 공립 상업 보습 학교, 1913년 군산 공립 중학교, 1916년 군산 공립 고등 여학교가 설립되었다.
군산에 설립되었던 위와 같은 교육 기관은 공립 교육 기관으로 군산부의 보조를 받으며 운영되었다. 일본인 학생들이 다수를 이루는 가운데 군산 지역 한국인 학생 수는 적었다. 기본적인 교육이외에 고등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도 제한되었다. 그 이유는 식민 당국이 한국인이 교육을 통해 실력 향상을 도모하여 자강 내지는 독립에 대한 생각을 키워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육 기관에서는 식민 당국의 교육 정책에 따라 일본어 학습을 강요하며 우민화를 통한 황국 식민화 교육을 지향하였다.
한편 일제강점기 한국인이 중심이 되어 운영되었던 학교로는 군산 중앙 유치원, 영신 여학원, 대성 학원 등이 있었다. 군산 중앙 유치원은 군산 부인 교육회에서, 영신 여학교는 군산 기독 교회에서, 대성 학원은 대성원(大聖院)에서 각각 운영하였다. 이들 교육 기관은 교육 기회에서 차별을 받고 있는 군산 지역 학령 아동들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하였다. 그렇지만 의연금 모집이나 기부금을 통해 학교가 운영되어 재정적 어려움에 노출되어 있었다. 1931년에는 식민 당국이 학교 시설 미비와 공립 학교와 역할이 중복된다는 이유로 폐교 혹은 기능을 축소시켰다.
[일본인 증가와 대형 농장 설립]
개항 이후부터 군산에 이주하기 시작한 일본인들은 사회 간접 시설이 확충되고 한국이 강제 병합되자 그 수가 더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군산에 거주하는 일본인 수는 개항 당시인 1899년(광무 3)에는 77명, 1910년(융희 4)에는 3,488명, 1919년에는 6,809명으로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이와 같이 일본인이 증가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는 일제의 척식 정책에 따른 농장 설립을 통한 미곡 생산과 무역을 독점하여 경제적 이득을 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군산에 진출한 일본인들은 시기별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주로 야마구치현[山口縣], 나가사키현[長崎縣], 에히메현[愛媛縣] 출신들이 많았다. 이들 가운데는 농업 자본가, 미곡상, 정미업, 양조업을 경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군산항을 중심으로 일본인이 경영하는 미곡상, 정미소, 양조장 등이 집중되었다.
이후 일본인 지주와 자본가들은 농업 경영에 뜻을 두고 군산 지역 토지를 매입해 나갔다. 그 결과 구마모토[熊本]·모리키쿠[森菊]·후다바사[二葉社] 농장과 같은 대형 농장들의 설립이 군산과 옥구 지역에서 이어졌다.
[미곡 수탈]
일본인이 설립한 대형 농장에서는 식민 당국의 조선 토지 조사 사업, 산미 증식 계획, 농촌 진흥 운동과 같은 정책과 군산 농사 조합(群山農事組合)과 단체 설립을 통해 토지를 확보하고 미곡 생산량을 늘릴 수 있었다. 생산된 미곡들은 철도와 도로를 통해 군산으로 집산되었고, 군산 미곡 검사소와 주요 정미소를 통해 품질이 규격화되어 가공되었다. 그 결과 일본에 이출된 미곡의 양이 1925년 998,769석(石)에서 1934년에는 2,285,114석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이렇게 유출된 미곡은 선박을 통해 오사카, 고베, 도쿄로 이출되었다.
그러나 일본으로 이출되는 미곡의 양이 늘어날수록, 군산 지역 농민들의 삶은 힘들어져 갔다. 많은 미곡을 생산하였지만 미가의 가격은 낮았고, 많은 미곡이 일본으로 이출되며 자신들이 소비할 수 있는 미곡량은 제한되었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중국에서 잡곡을 수입하여 소비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또한 일본인 지주들의 소작권 이동과 고율 소작료 부가, 제반 비용 전가로 농민들은 토지에서 이탈하여 토막민의 삶을 살아갔다. 그렇기에 일제강점기 군산에서 일본으로의 미곡 이출은 수탈적 성격이 띠고 있었다.
[1930년 이후 병참 기지화]
일제의 전시 수탈이 강화되는 1930년 중반 이후 군산은 미곡 수출의 감소로 상업에서 공업 도시로 변화를 시도하였고, 전쟁 수행에 필요한 물자를 생산하는 시설이 건립되거나 방공 기지화 되었다. 군산 부윤, 군산 부회, 군산 상공 회의소 인사들은 조선 총독부와 일본 정부를 상대로 공장 유치 활동을 전개하였다. 조선 총독부에서는 전쟁이 확대되자 전쟁 수행에 필요한 방향으로 군산 시가지를 변모시켰다. 이는 군산이 1930년 중반 이후 병참 기지화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군산 부윤, 군산 상공 회의소 인사와 같은 지역 유지들은 군산이 항만에 인접한 지리적 이점, 공업용 연료에 사용되는 석탄 확보의 용이, 항만·철도·도로망을 갖춘 교통의 요지, 남조선 전기 주식 회사를 통한 전력 확보, 전라북도과 충청남도에서 저렴한 노동력 확보와 같은 이점을 가지고 있기에 공업 도시로 변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들은 군산에 공장을 설립하기 위해 식민 당국과 일본인 자본가를 상대로 활동을 펼쳤다. 그 결과 종연(鐘淵)·창부방적(倉敷紡績)과 같은 방직 공장 및 화학 물질을 취급하는 인산(燐酸) 공장 등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 결과 설립된 공장들은 순수하게 군산 지역 공업 발전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전쟁 수행에 필요한 물자 생산에 목적을 두고 있었다.
한편 태평양 전쟁이 확대되자 1940년 11월 29일 방공 건축 규제 도시 예정지로 군산이 지정되었다. 이를 실행하기 위해 군산 시가지 계획이 실행되었다. 군산 시가지 계획에 따라 군산은 군부대 배치를 위한 토지 구획 정리 및 비행기 폭격에 대비한 방공호가 구축되는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항일 독립운동]
군산 지역에서 일제를 상대로 한 항일 독립운동은 의병 전쟁의 분위기를 이어 일제 강점기에도 지속되었다. 일제는 한국을 안정적이고 영속적으로 지배하며 경제적 이득 추구를 목적으로 식민 지배를 실시하였다. 군산은 일제의 식민 지배 목적에 부합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춘 지역으로 미곡을 중심으로 한 경제적 수탈이 끊이지 않았다. 그 결과 3·1 운동 이후 학생, 노동자, 농민이 중심이 되어 일제의 수탈과 차별에 맞서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 학생 운동
일제강점기 군산 지역 대표적 학생 운동은 영명 학교와 군산 공립 보통 학교 학생들이 참여한 3·1 운동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영명 학교는 3·1운동 당시 학생과 교사가 중심이 되어 군산 지역에서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의 활동에 영향을 받고 군산 공립 보통 학교 학생인 김수남(金壽男)·이남률(李南律)도 3·1 운동에 동참하였다. 이들은 일본인 교장으로 인해 3·1 운동에 동참하지 못하게 되자 군산 공립 보통 학교에 방화를 하고, 학생들의 참여를 유도하였다. 학생들의 이러한 독립운동 열기는 인근 옥구·임피 지역에 전해져 대규모의 만세 시위운동이 전개될 수 있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1930년에는 광주 학생 운동의 영향을 받고 군산 공립 고등 여학교 학생 김귀선(金貴先)이 민족 독립의 필요성을 알리기 위해 학생 운동을 준비하다 검거되는 일이 있었다.
2. 노동 운동
일제 강점 이후 군산은 미곡 집산과 도시화 진전으로 새로운 일자리가 발생하게 되었다. 옥구·임피 등 여러 지역에서 군산으로 유입되는 인구가 늘어났다. 유입된 인구들은 군산항과 역에서 하역에 종사하는 노동자가 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저임금에 장시간 노동을 하며, 일제 자본가의 착취에 생존권 위태로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3·1 운동 이후 사회 주의 사상이 군산에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사회 주의를 받아들인 지식인을 중심으로 미곡과 철도를 중심으로 한 노동 운동 단체 결성이 시작되었다. 노동자들은 일제 자본가에 맞서 자신들의 권익 옹호를 위해 노동 운동 단체에 합류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일제 자본가의 임금 수탈과 중노동에 시달렸던 노동자들이 군산 미선 조합·군산 철도 노동회와 같은 단체를 중심으로 노동 운동을 전개하였다. 노동 운동은 파업을 통해 전개되었고, 식민 당국과 일제 자본가에 맞서는 항일 운동의 성격으로 진행되었다.
3. 농민 운동
군산은 개항 이후 주변의 넓은 평야 지대와 항구라는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일본인의 이주가 많았다. 군산으로 이주한 일본인들은 식민 당국의 정책에 호응하며 군산을 통해 미곡을 유출하며 경제적 이득을 획득하고 있었다.
특히 군산과 주변 지역에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대형 농장의 설립이 많았다. 이들 대형 농장에서는 마름을 고용하여 한국인 소작농에 감시를 늦추지 않았다. 소작권이동을 빌미로 소작농들이 생산한 미곡에 대해 고율의 소작료를 부과하거나, 그 이외의 제반 비용을 전가하여 농민들의 삶을 어렵게 하였다.
이에 군산 지역 농민들은 청년 단체와 농민 단체의 후원 아래 농민 운동을 전개하였다. 농민 운동은 고율의 소작료 인하를 요구하며 진행되었고, 후다바사[二葉社農場] 농장에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후 군산 지역에서 농민 운동은 소작료 인하를 요구하며 진행되었고, 단지 자신들의 경제권익 확보를 위한 투쟁에 머물지 않고, 민족 독립을 향한 항일 운동의 성격으로 변화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