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0535 |
---|---|
한자 | 沃溝農民抗爭 |
이칭/별칭 | 옥구 소작 쟁의,이엽사 농민 항쟁,서수 농민 항쟁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원기 |
[정의]
1927년 전라북도 옥구의 일본인 이엽사 농장(二葉社農場)에서 고율의 소작료를 인하할 것을 요구하며 지역 농민 조합과 청년 단체가 중심이 되어 일으킨 사건.
[개설]
3·1운동 이후 1920년에 들어서며 농민 운동은 지역 유지와 청년들을 중심으로 농민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단체를 조직하며 전개되었다. 일본인 대농장들이 많았던 군산·옥구·임피 지역에서도 청년과 사회주의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농민 조합을 결성하였다. 결성된 농민 조합에서는 농민들의 계몽을 통한 생활 개선 및 실력 양성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군산·옥구를 배경으로 기반을 잡고 있던 일본인 지주들은 각 지에 걸쳐 대농장을 경영하며 농민들을 착취하였다. 지주들은 농민들에게 기본적인 소작료 외에 비료대, 수세, 운반비, 지세, 공과금 등의 부담을 전가하여 농민들의 삶은 더욱 어려움에 처해지게 되었다. 일본인 시라세이[白勢量作]가 옥구에 설립하여 운영중인 이엽사 농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옥구에 기반을 두고 있던 이엽사 농장에서는 75%에 이르는 고율의 소작료로 농민들의 삶에 어려움을 주었다. 이에 옥구 농민 조합 장태성(張台成)을 비롯한 간부들이 소작료를 40%~50%로 내려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농장 측에서는 거절하였다. 이에 옥구 농민 조합·서수 농민 조합과 서수 청년회를 중심으로 소작료 불납을 결의하면 소작 쟁의에 들어가게 되었다.
[역사적 배경]
일제의 식민 지배가 시작된 이후 피해가 컸던 부분 중 하나는 농촌이었다. 1910년대 조선 토지 조사 사업으로 구축한 식민지 지주제를 토대로 1920년에서 1930년 초까지는 미곡 수탈을 위한 산미 증식 계획을 시작하였다. 전시 체제기에 들어간 1930년 이후에는 농촌 진흥 운동을 실시하여 전쟁에 필요한 식량 공급지로 이용하였다.
일제의 정책은 토지를 근간으로 하여 살아가고 있는 농민층의 분해를 유도하였다. 일본인 지주와 한국인 농민 사이에는 식민지적 지주-소작관계가 형성되었다. 자작농들은 식민 당국과 지주들의 무력을 동반한 토지 수탈과 침탈로 소작농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소작농으로 전락한 한국인 농민들은 삶을 유지하기 위해 소작권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을 하였다.
하지만 일본인 지주들은 소작농에게 고율의 소작료를 부과하고, 중간 관리인 마름의 횡포에 이중고를 겪었다. 이로 인해 그들은 삶의 기반을 잃을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렇게 생존권을 위협받는 소작농들은 문제의 해결을 위해 일제 지배의 틀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인식하에 소작 쟁의 활동을 일제 강점기 동안 진행하게 되었다.
[경과]
옥구 소작 쟁의는 1927년 8월~11월 사이에 진행되었다. 1927년 8월 9일 서수 청년회에서는 농민 계몽을 목적으로 강연회를 개최하였는데, 내용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강사 3명이 연행되었다. 이에 농민 수백 명이 주재소를 둘러싸고 체포된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만세 운동을 벌였다.
11월 15일에는 조합원 수백 명이 소작료 인하를 요구하며 이엽사 농장 앞으로 시위를 하며 행진하였다. 하지만 농장 측에서는 소작료를 75%로 올리자 서수 농민 조합(瑞穂農民組合) 소작인 대표 등이 모여 소작료 납부 거부를 결의하였다.
11월 25일 서수 농민 조합 소속 장태성과 김행규(金杏奎) 등은 이엽사 농장 일본인 지배인에게 소작료를 45%로 감액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요구는 거절되었고, 장태성이 지배인을 협박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저녁 무렵 이진섭(李鎭燮)은 장태성이 군산 경찰서로 이송되기 위해 서수면 임피(臨陂) 경찰관 주재소에 대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조합원들에게 전하였다.
그러자 김재풍(金在灃)·오승철(吳承喆)·이성순(李聖淳)·김행규·문일만(文一萬)·신문관(申文官)·최봉엽(崔鳳燁) 등은 조합원 수백 명을 동원하여 밤 9시경 임피 경찰관 주재소로 몰려가 건물을 파괴하고, 경찰을 구타하여 장태성을 구출하였다. 또 돌아가는 도중 서수 주재소에 간부 박상호가 피체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밤 10시경 그곳을 습격하여 박상호를 구출하였다.
[결과]
농민 조합과 청년회가 중심이 되어 진행된 이엽사 농장 소작 쟁의를 진압하기 위해 군산 경찰서는 모든 병력을 동원하였다. 하지만 농민들을 진압할 수 없자, 군산 지역 소방대를 동원하고, 인근 경찰서에 지원을 요청하여 소작 쟁의를 탄압하였다.
결국 옥구 농민 조합·서수 농민 조합 조합원 80여명이 체포되어 1927년 12월 8일 51명이 검찰에 송치되었다. 검찰에 송치된 장태성, 문일만, 오요섭(吳堯燮), 오승철 등은 이른바 소요 및 구금자 탈취라는 죄명으로 재판에 회부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의의와 평가]
옥구 이엽사 농장 소작 쟁의는 지역 농민 조합이 주도한 농민 운동으로 일제의 식민 수탈 체제에 대항한 항일 농민 운동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는 쟁의에 참여한 소작농들이 경제적 투쟁을 넘어 민족의 자존과 독립을 위해 소작 쟁의를 진행시킨 것이다. 또한 농촌 사회 공동체 조직이 근간이 되어 쟁의가 전개된 점에서 1920년대 후반 전라북도 지역 농민 운동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