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008 |
---|---|
한자 | 四大宗敎聖地-精神文化-首都益山 |
영어공식명칭 | Iksan, the Center of the Spiritual Culture that Holds the four Religious Sacred Places |
분야 | 종교/불교,종교/기독교,종교/신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허남진 |
[정의]
미륵 신앙, 초기 기독교, 원불교 교화의 중심지로 불리면서 대표적 4대 종교의 성지인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 전라북도 익산.
[개설]
종교 성지는 성스러운 것을 담고 있는 장소이다. 종교 성지를 통해 해당 종교가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으며, 그 종교의 사상적 특징을 이해할 수 있다. 익산은 백제의 정신문화인 미륵 신앙이 살아 숨 쉬는 익산 미륵사지, 한국인 최초 신부인 김대건 신부가 조선 땅에 첫발을 디딘 나바위성지, 남녀유별의 유교적 관습으로 세워진 ‘ㄱ’자형 구조의 두동교회, 대표적인 한국 신종교인 원불교 익산성지가 모여있다. 보기 드물게 4대 종교의 성지를 품고 있다는 점에서 익산은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로서 위상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익산은 다양한 종교 성지를 품고 있는 것인가? 그 이유는 익산이 지닌 역사적 전개와 함께 공간적 특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익산이 역사의 전면에 부각된 것은 백제 무왕의 천도지로 등장한 때이다. 익산 천도 당시에 창건된 미륵사는 미륵 신앙의 중심지로 존재하게 되었고, 이러한 미륵 신앙은 미륵사를 중심으로 아래로는 김제 금산사, 고창 선운사, 위로는 논산 관촉사, 속리산 법주사로 연결되고 있다.
익산은 예부터 금강과 만경강을 중심으로 한 교통의 요충지였으며, 호남선·전라선·군산선 등 철도가 개설되면서 더욱 더 교통의 교차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러한 익산의 공간적 특성은 자연히 종교 사상의 교차점 역할까지 담당하게 된다. 일례로 계룡산과 모악산은 한국 신종교의 메카가 되었고 정읍, 김제, 익산, 논산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한국 신종교의 주요한 활동 무대가 되었다. 원불교를 창립한 소태산 박중빈은 수운 최제우의 동학과 증산 강일순의 사상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에서 익산은 종교 사상의 주요 통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박중빈이 종래 전라남도 영광을 중심으로 한 기성 조합을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익산에 불법연구회 총부를 건설하게 된 이유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한편, 익산의 여산 역시 호남의 관문으로 일찍이 천주교가 전래되었고, 뮈텔 주교의 『치명일기(致命日記)』에 기록된 여산의 순교자가 25명이었듯이, 여산은 수많은 순교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또한 한국인 최초 신부인 김대건 신부가 중국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조선 땅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역사적 순간을 간직한 곳 역시 익산이다. 아울러 익산은 초기 한국 개신교 전래와 역사를 읽을 수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호남 지방의 개신교 선교는 미국남장로교회 해외 선교부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에 의해서 출발하였다. 전라북도에서 전주 다음으로 군산에 개신교 선교부가 조성되었다. 군산은 전라북도와 충청남도가 만나는 금강 하구에 위치하여 수상교통이 발달하였고, 남장로교회 선교부는 군산에서 충청남도 지역과 선교 벨트를 연결하였다. 금강에 인접한 익산 역시 당연히 개신교가 내륙으로 확산되는 통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익산 지역 인근에는 한국 최초의 한옥 성당인 되재성당이 있고, 익산에는 현존하는 한옥 성당인 익산 나바위성당이 있다. 초기 한국 개신교 특히 장로교회 건축의 일반적 특징은 토착교회 설립 방법인 자립(自立), 자치(自治), 자전(自轉)이라는 삼자 원리가 공식 선교 정책인, 즉 ‘네비우스(Nevius) 선교 정책’이 채택되면서, 자급 원칙에 따라 선교사의 자금 지원이 필요한 서양식 건물이 아니라 교인들이 스스로 건축할 수 있는 한옥 예배당을 설립하였다. 또한 ‘남녀칠세부동석’으로 대변되는 조선 시대의 남녀유별 관습으로 남녀 좌석을 구분하기 위한 ‘ㄱ’자형 교회가 건축되었다. 그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대표적인 교회가 익산의 두동교회이다.
[백제 미륵 신앙의 도량 미륵사]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에는 용화산[미륵산]이 우뚝 솟아 있다. 용화산 중턱에 사자암이 있으며, 그 아래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사적 제150호 익산 미륵사지(益山彌勒寺址)가 펼쳐져 있다. 현재 익산 미륵사지에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으로 알려진 국보 제11호 익산 미륵사지 석탑(益山彌勒寺址石塔)과 보물 제236호 익산 미륵사지 당간지주(益山彌勒寺址幢竿支柱) 2기가 남아 있는 등 절 규모 역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대하다. 미륵사(彌勒寺)라는 대규모 사찰이 창건된 것으로 당시 미륵 신앙이 백제를 대표하는 신앙이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익산은 공주, 부여와 함께 백제문화를 대표하는 지역이다. 백제 미륵 신앙의 핵심은 익산 미륵사의 창건에 있다. 익산이 미륵이 하생하여 성불하는 이상적인 지역으로 상징화되어 미륵 신앙의 중심지가 되었다는 사실에서 무왕(武王)이 이곳에 미륵 신앙을 바탕으로 한 용화세계(龍華世界)를 건설하고자 한 염원을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미륵 신앙이 무엇인가 간략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륵(彌勒)은 범어인 마이트레야(Maitreya)를 옮긴 말로, 『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에는 미래에 성불할 것이라는 수기(授記)를 받고 지금은 도솔천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 미륵불이 머물고 있는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것이 미륵 상생신앙(上生信仰)이며, 미륵불이 이 땅에 내려와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널리 중생을 구제할 때에 그 세계에 태어나 설법에 참여함으로써 성불을 바라는 것을 미륵 하생신앙(下生信仰)이라고 한다.
그래서 익산 미륵사는 미륵 하생신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미륵사를 창건한 인물이 사택왕후로 밝혀졌지만, 『삼국유사』에 무왕과 선화공주가 용화산 사자사(師子寺)로 가는 도중에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나자 미륵삼회(彌勒三會)를 법대로 본받아 미륵사를 창건하였다는 내용이 전해진다. 이는 미륵의 용화수 아래의 출현을 비유한 것으로, 미륵 하생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그러므로 미륵사는 미륵불 출현의 염원이 담겨 있는 불교 성지임에 분명하다. 이러한 익산 미륵사의 종교 사상적 의미와 함께, 미륵이 출현할 때 지상 세계는 전륜성왕이 다스리는 세계라는 점에서 무왕은 전륜성왕으로 대비된다. 이는 무왕에게 익산 지역은 정신적 구심점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미륵사가 창건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미륵 하생신앙은 『정감록(鄭鑑錄)』이나 개벽사상 등 조선 후기 신종교에 상당한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특히 미륵 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원불교 익산성지가 익산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은 미륵 신앙의 흐름과 잇닿는다.
[한국인 최초 신부인 김대건 신부가 사제가 되어 조선에 입국하여 첫발을 디딘 땅]
익산역에서 논산 방면으로 가다 보면 왼편에 나즈막한 산이 하나 보이는데, 바로 나바위성지가 위치한 화산(華山)이다. 나바위성지는 한국인 최초 신부인 김대건(金大建) 신부와 관련된다. 김대건 신부는 한국 천주교사에서 김대건 신부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 김대건 신부는 1925년 한국 천주교의 공적 공경의 대상이 되는 ‘복자’로 시복되었고, 1984년 교황이 방문하여 김대건 등 한국 순교자 103위에 대하여 거행한 시성식(諡聖式)을 통하여 세계의 모든 천주교 신자가 공적으로 숭경하는 대상인 성인(聖人)이 되었다. 그 결과 천주교에서는 김대건 신부의 탄생지[솔뫼성지]와 첫 사목지[은이성지], 순교 터[새남터 성지], 무덤[미리내성지]은 물론 국내외에 산재해 있는 관련 지역들이 성지 혹은 사적지로 조성되었다. 김대건의 유해는 중국, 독일, 오스트리아 등 세계 각국에 널리 분배되어 많은 천주교 신자들에게 공경을 받고 있다. 현재 김대건 신부 일행의 상륙 장소에 대해서 화산설, 황산포설, 강경포설 등 다양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지만, 나바위성지 역시 김대건 신부가 사제 서품을 받고 입국한 장소라는 점에서 한국 천주교사에서 중요한 장소로 인식되고 있다.
김대건 신부는 1845년 8월 17일 상해 금가항(金家巷)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의 집전으로 사제품을 받았다.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 성 다블뤼 주교 등과 함께 무동력선 ‘라파엘(Raphael)호’를 타고 조선 입국을 시도하였다. 당시 김대건 신부 일행이 목적지로 삼았던 곳은 한양으로 직접 들어갈 수 있는 한강이었다. 하지만 풍랑을 만나 표류하던 라파엘호는 제주도 죽도[차귀도]에 표착하게 된다. 여기서 배를 수리하고 김대건 신부 일행은 한강으로 들어갈 경우 체포될 위험성이 크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입국 장소를 충청도 은진의 강경으로 변경한다. 이렇게 김대건 신부 일행은 1845년 10월 12일 밤 8시 무렵 강경 인근 ‘황산포 나바위 화산 언저리’에 도착하게 되었다. 김대건 신부 일행은 잠시 강경 지역의 구순오 집에 잠시 거처하다가 본격적인 사목을 위하여 한양으로 떠나게 된다. 익산의 나바위성지는 바로 이러한 김대건 신부의 입국 역사를 간직한 장소이다.
나바위성지에 위치한 사적 제318호 익산 나바위성당 내부에는 김대건 신부 유해가 안치되어 있으며, 화산 정상에는 ‘김대건 신부 순교 기념비’가 건립되어 있어 천주교 신자들의 순례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남녀칠세부동석, ㄱ자형 한옥 예배당]
익산시 성당면 두동리 편백마을에 위치한 두동교회 구본당은 2002년 4월 6일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79호로 지정되었고, 한국기독교 사적 제4호로 등록되는 등 초기 한국 개신교 역사의 이해와 건축 연구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건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렇다면 두동교회는 어떠한 성스러움을 지닌 장소인가?
일제 강점기 익산시 성당면은 남장로교 선교사 해리슨(William B. Harrison)이 활동한 지역이었다. 두동교회가 건립되기 이전 두동마을의 개신교인들은 인근 부곡교회에 출석하였는데, 이들 중에 마을 부호였던 박재신의 어머니 황한라와 부인 한재순이 있었다. 처음에 박재신은 집안 여자들의 교회 출입을 반대하였지만 자손이 귀한 집안에서 박재신의 처 한재순이 임신하게 되자 박재신이 자기 집 사랑채를 예배당으로 내놓게 되면서 두동교회가 시작되었다. 이후 박재신의 소작인들이 자발적으로 교회에 나오면서 당시 교인이 80명으로 증가하였다. 1929년 박재신의 아들이 갑자기 사망하자 박재신은 교회를 떠나게 되고 이에 새로운 예배당이 필요하게 되었다. 교인 가운데 이종규가 채마밭 330㎡[100여 평]를 제공하여 교회를 건축할 장소는 마련되었으나 교회 건축에 필요한 목재는 구하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인근 안면도에서 나무를 실은 배가 풍랑을 만나 파선되었고, 그 나무들이 때맞춰 익산 성당포구까지 떠밀려 왔다고 한다. 그래서 이 나무들을 헐값에 사들여 교회를 건축하고 1929년에 지금의 ‘ㄱ’자형 교회를 건립하게 되었다. ‘ㄱ’자형 교회는 토착적인 자율성을 강조하는 ‘네비우스 선교 정책’과 개신교와 유교문화가 결합되면서 나타난 교회 건축의 유형이다. 두동교회는 김제에 있는 금산교회와 함께 전라북도에 소재한 ‘ㄱ’자형 교회이다.
[소태산 박중빈이 19년간 교법을 편 전법성지]
원불교중앙총부가 위치한 국가등록문화재 제179호 원불교 익산성지는 원불교 종립대학인 원광대학교와 마주하고 있다. 원불교에서는 원불교 익산성지를 ‘원불교 전법성지’로 부른다. 원불교 익산성지는 원불교 창립자 소태산 박중빈(朴重彬)이 직접 건설하고 19년간 교화 활동을 전개하다가 열반한 곳이다. 원불교 익산성지 내에는 원불교단 사적유물관리위원회에서 보존지역으로 지정한 소태산 박중빈 당시 활동 지역과 개교반백년기념사업을 하면서 전개한 각종 기념물과 건물이 건립되어 있는 등 원불교의 역사가 그대로 담겨 있는 성지이다.
원불교 3대 종법사인 대산 김대거(金大擧)가 원불교 익산성지에 대해 “대종사께서 천여래 만보살을 모으시고 일원의 심인을 찍도록 해 주신 곳이요, 정기와 상시로 훈련을 실시하시고 교서를 친히 결집하신 곳이며, 주세불의 법력으로 제생 의세의 큰 경륜을 펼치시고 계미년에 열반하신 대성지이니라.”[『대산종사법어』, 제1 신심편 52장]라고 언급한 바와 같이, 원불교에서 원불교 익산성지가 차지하고 위상은 크다. 그렇다면 원불교 전법성지가 익산에 건설된 이유는 무엇인가?
박중빈은 변산에서 교법을 발표한 후 교화를 펼친 총부의 건설 기지를 모색하였다. 박중빈은 전라북도 전주 완산동 전음광의 집에서 서중안, 송만경, 이청춘, 이청풍, 문정규, 박원석, 전음광 등이 발기인이 되어 불법연구회 창립 준비를 논의하였다. 이때 박중빈은 “이리 부근은 토지도 광활하고 교통이 편리하여 무산자들의 생활과 각처 회원의 내왕에 편리할 듯하니 그곳으로 정함이 어떠한가”[『불법연구회창건사』]라고 익산 총부 건설의 이유를 밝히었다. 창립총회 후 박중빈은 제자들과 함께 익산 주변을 직접 돌아다닌 뒤 당시 익산시 북일면 신룡리를 총부 건설의 장소로 선택하였다. 이후 여러 제자들의 건축 희사금으로 총부 건설이 완공되어 이때부터 원불교 교직자인 전무 출신들의 공동생활이 시작되었다. 당시 전무 출신들은 낮에는 엿장수, 고무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한자리에 모여 박중빈의 법설을 듣고 수행하는 등 영육쌍전(靈肉雙全)의 정신을 이어 나갔다.
이러한 역사를 지닌 원불교 익산성지 내에는 박중빈이 당시 건립한 대각전, 본원실, 공회당, 구조실, 금강원, 정신원, 구정원 등과 소태산 대종사 성탑, 성비, 정산종사 성탑, 영모전 등 원불교 각종 사적과 반백년기념관, 원불교역사박물관 등이 위치하고 있다. 특히 본원실은 익산총부의 건설 당시 ‘불법연구회’ 간판을 기둥에 걸고 첫 사무소를 설치한 장소이며, 처음으로 대집회를 위하여 1935년에 건립한 대각전 전면에는 원불교의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인 일원상이 최초로 봉안되는 등, 원불교 익산성지는 원불교 교단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간직하고 있는 장소이다. 원불교 익산성지의 성스러움은 소태산 대종사의 성해(聖骸)가 안치된 ‘대종사성탑(大宗師聖塔)’을 들 수 있다. 대종사성탑 주변에는 박중빈의 일대기인 십상과 친필, 게송을 조각해 놓았다.
원불교 익산성지에는 성스러운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원불교 『대종경선외록(大宗經選外錄)』에 따르면, 한국전쟁 당시 공산군 대대 본부가 익산총부에 주둔하게 되어 공산군에게 접수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총부에서는 조실과 대각전 정미소만 사용하게 되었다. 익산총부 내에 공산군 1개 대대가 주둔해 있는 데다가 무기, 식량 등 군수물자가 쌓여 있어, 공습의 표적이 되어 유엔군의 공습이 날로 가중되었다고 한다. 또한 당시 익산총부에 북한군 부대 사령부가 주둔해 있어 유엔군 전투기가 여러 번 폭격하였다. 익산총부 상공에도 전투기가 여러 차례 목격되었지만 폭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북한군이 철수하고 얼마 뒤 비행사 한 사람이 총부를 방문하여 최고 책임자를 찾았다. 비행사는 “이상한 일이 있었기에 찾아왔습니다. 원불교 총부에 북한군 부대 사령부가 주둔하고 있다는 정보를 가지고 이곳을 폭격하기 위하여 몇 차례 여기 상공을 맴돌았습니다. 그때마다 이곳에는 서기(瑞氣)가 어리어 있어 폭격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목천포에 폭탄을 떨어뜨렸습니다.”라고 말하였다고 전해진다. 원불교 2대 종법사 송규(宋奎)는 뒷날 제자들에게 한국전쟁 당시 총부가 피해가 없었던 것은 신장들이 총부를 호위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