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08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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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安立 |
이칭/별칭 | 영택(永澤),학주(學輈),성장(性長)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태락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제우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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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태락리 |
성별 | 남 |
생년 | 1873년 12월 3일 |
몰년 | 1948년 1월 2일 |
본관 | 연일 |
대표경력 | 보성전문학교장 |
[정의]
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연일(延日). 본명은 정영택(鄭永澤), 호는 학주(學輈), 자는 성장(性長)이다. 1873년(고종 10) 12월 3일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태락리에서 출생하였다. 구한말 애국계몽운동을 하다 합방이 되자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만주사변 뒤에는 상해에서 동아국제연맹을 조직, 활동하다 체포되었다. 광복후에도 남북통일기성회 회장으로 통일운동을 하였다.
[활동사항]
정안립(鄭安立)[1873~1948]은 1888년(고종 25)년에 16세로 사마시 생원과에 합격한 후 법관양성소(1895)·한어학교(漢語學校)[1897]를 졸업하였다. 혜민원 주사[1902], 법관양성소 교관[1905], 보성전문학교 교감[1905], 신민회(新民會) 회원[1907], 보성전문학교 교장[3대, 1909. 2]을 지냈고, 청주에 보성학교를 설립[1909. 5. 10]하는 등 구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에는 양성군수(陽城郡守)를 역임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정태은(鄭泰殷)·김만배(金萬培)[金益濟로 개명, 金萬熙의 동생]·이증수(李曾秀) 등 여러 동지들과 우국단(憂國團)을 조직하여 항일독립운동의 방략을 모색하였다. 국내에서의 활동이 여의치 않아 정태은·김만배 등과 미국으로 건너가려고 하였으나, 정안립만이 검역에서 탈락하여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1910년 만주 길림성으로 망명하여 이름을 정안립이라 개명하고[1911], 길림성 간도 일대에서 유동열(柳東說) 등과 항일독립운동 자치조직인 동삼성한족생계회(東三省韓族生計會)[1917]를 설립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8년 3월에는 여준(呂準)·유동열·신팔균(申八均)·김동삼(金東三)·김좌진(金佐鎭)·서일(徐一) 등 39명의 이름으로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1919년 4월에는 여준 등과 함께 파리강화회의에 ‘조선독립안’을 제출하기 위한 대계획을 수립 하였다.
그는 또 동삼성 순열사인 장작림(張作霖)을 일제가 암살할 것이라는 정보를 알고 급히 전보로 알려 장작림의 위기를 모면케 하였다. 만주사변(滿洲事變)[1931. 9. 18.] 후 상해에서 동아국제연맹(東亞國際聯盟)[1933~1940]을 조직하여 일본·중국 등을 무대로 활동하던 중 일제 고등계 형사들에 의해 서울로 압송되어 중부서에 연금되었다. 광복 후 1946년 남북통일기성회 회장을 맡아 통일운동을 하다가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