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03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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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獨立運動家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
집필자 | 정제우 |
[정의]
구한말·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이거나, 진천 지역에서 국가의 독립을 위해 활동한 사람들.
[개설]
진천은 한반도 중부권의 교통 요지로 구한말 국권 회복 운동으로부터 일제강점기에 3·1운동과 그 후의 무장 독립 전쟁, 그리고 문화 운동 등 다양한 독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국권회복운동]
일본의 조선 침략이 노골화되자 진천 지역에서도 무장 항일 투쟁이 전개되었다. 의병 투쟁 전기에는 소극적이었으나, 중기에는 박재만 의병 부대 등이 활약하였고, 후기에는 전국적 상황과 맞물려 한봉수·이병필·민찬식 등이 진천군 각지에서 대대적인 항일 의병전을 전개하였다. 특히 이월면의 쌍호, 화산당 장양리, 광혜원 만죽에서는 일제 ‘대토벌대’의 포위 공격에 필사적으로 항전하였다. 이 전투에서는 무려 28명의 순국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이 기간 항일 구국 계몽 운동으로 이상직의 문명학교, 신팔균의 신명학교, 그리고 성공회의 아동교육 등 다양한 형태의 교육 운동이 활발하였다. 또한 이상설은 일제 황무지 개척권 요구 반대 상소를 비롯하여 을사늑약 반대 운동을 주도하였고, 국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과 관련하여 간도에 서전서숙(瑞甸書塾), 북만주에 한흥동(韓興洞)을 건설하였다.
1907년에는 헤이그 특사를 보내 구국 순방 외교를 폈다. 특히 1910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의병을 통합하여 국내 진공 작전을 펴고자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을 편성하였으며, 국망을 눈앞에 두고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여 구미 열강에 성명회 선언을 발표하였다. 한편 정추택과 이한용은 진천에서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여 일제의 경제 침략에 저항하는 민족 경제 운동을 폈다.
[1910년대]
일제의 우리나라 강점을 전후하여 오상근(呉相根)은 국내 항일 비밀 결사인 대동청년단원으로 활약하면서 3·1운동을 계획하였으며, 이상설은 연해주에서 권업회를 조직하고 1914년에는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하여 정통령이 되어 독립운동을 폈다. 신팔균·정안립·김좌진 등 39명은 만주에서 무오년에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진천 지역 각 읍과 각 면에서 이상직·윤병환·이영호·신영희 등 수 천명이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또 진천성공회 신도로 경성고보 학생 홍순복과 중앙고보 학생 조명희, 그리고 청주농업학교 학생 박승하는 각기 서울과 청주에서 3·1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엄주동은 서울에서 비밀 결사인 조선산직장려계(朝鮮産織奬勵契)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투옥되었으며, 대종교에 입교하여 중국 각지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1920년대]
신팔균은 서간도에서 신흥무관학교 교장으로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였으며, 청산리대첩 이후 1924년 대한통의부의 군사위원장·의용군사령관으로 무장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순국하였다. 신팔균의 부인 임수명도 통의부단원으로 활동하다가 남편 신팔균의 순국 소식을 듣고 자결하였다. 전참판 홍승헌·홍경식 부자는 서간도로 망명하여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홍경식은 3·1운동 후에 한족회 간부로서 무장 항전 중 서울에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3·1운동에 참가했던 조명희는 1925년 전후하여 카프(KAPF)[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를 조직하여 중앙위원으로 항일 민족 해방 운동을 하였다. 1928년에는 소련으로 망명하여 조선사범학교 교수, 소련작가동맹 맹원, 『선봉』의 주필 등 민족 교육과 민족 문화 수호 운동을 전개하였다. 1937년 소련 정부에 의해 투옥, 숙청되었던 조명희는 1956년 복권되었다.
[1930년대 이후]
1930년 1월 광주 학생 운동이 서울까지 전개되자 진천 출신인 채수복은 협성실업학교 학생으로 독립 만세 운동을 하고 중국으로 망명하였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옥중 순국하였다. 박기성은 중국에서 무정부주의자 연맹인 남화한인청년연맹을 조직하였으며, 1938년에는 한국전지공작대를 창립하여 간부로 활약하였다. 이후 1941년 한국광복군 제5지대의 분대장을 지내다가 총사령부에 전입되어 8·15광복 때까지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유재복과 오상근은 중경의 광복군 총사령부 경위대에 입대하여 토교대(土橋隊)에 배속되어 정부 요인들의 신변 보호와 그 가족들의 경호를 맡는 등 독립운동을 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