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03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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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獨立運動 |
이칭/별칭 | 광복운동,민족운동,해방운동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정제우 |
[정의]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이거나 진천 지역에서 벌인 항일 민족 독립운동.
[의병전쟁과 계몽 운동]
1894년 7월 청일전쟁 전후 일제의 군사적 침략으로 조선이 반식민지가 되자 한민족의 국권 회복 운동은 항일 의병전으로 시작되었고, 1904~1905년 러일전쟁과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실력 양성을 위한 구국 계몽 운동이 전개되었다. 진천의 의병전쟁은 전기 의병기[1894~1896]에는 소극적인 항일전이었다. 중기[1904~1907. 7월]에는 박재만 등 의병 부대의 항일전이 진천군 내 여러 곳에서 재개되었다. 후기[1907. 8.~1910]는 의병 항일전의 고조기로서, 한봉수·이병필·민창식·방인관·배창근·박관실·박향래·신창현 등의 의병 부대들이 진천읍을 비롯한 모든 면 단위 지역에서 치열하게 의병전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1907년 10월 8일, 신창현 등의 의병 부대가 이월면의 쌍호·화산당·장양리와 광혜원면의 만죽리에서 일본군 토벌대와 격전을 벌이고, 그들의 포위·공격을 필사적 항전으로 분쇄하였다. 이 전투에서 아군의 순국 희생자는 28명이었다. 같은 해 11월 중순에는 일본군의 만행으로 진천군 관아가 객사 등 일부를 제외하고 모두 소각되었다.
이 기간에는 항일 구국 계몽 운동이 전개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이상직의 문명학교[1905], 신팔균의 신명학교[1908], 그리고 성공회의 아동 교육 등을 들 수 있다. 진천 출신 이상설은 일제 황무지 개척권 요구 반대 상소를 비롯하여 을사늑약 반대 운동[1905]과 국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과 관련하여 간도에 서전서숙[1906]을 세워 민족 교육의 요람으로 키웠다. 또한 북만주에 한흥동을 건설하였으며, 1907년에는 헤이그 특사로 구국 순방 외교를 폈다.
특히 1910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의병을 통합하여 국내 진공 작전을 펴고자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을 편성하였고, 국망을 눈앞에 두고 성명회를 조직하였으며, 구미 열강 등에 성명회 선언을 발표하여 일제의 한국 병탄 성토 운동을 폈다. 한편 정추택과 이한용은 진천에서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여 일제의 경제 침략에 저항하는 민족 경제 운동을 폈다. 그리고 오상근·신팔균·안희제 등 80여 명은 비밀 독립운동 단체인 대동청년단을 조직하여 국권 회복 운동을 전개하였다[1909].
[1910년대 민족 독립운동]
일제의 무단 통치와 경제적 수탈로 진천 출신을 비롯한 많은 애국지사들이 국외로 망명하여 적극적인 민족 해방 운동을 폈다. 이상설은 1910년 이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 권업회(勸業會)를 설립하고, 이동휘 등과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1914]라는 최초의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독립군을 조직하여 무장 투쟁을 계획했으며, 상하이로 건너가 박은식 등과 신한혁명당[1915]을 조직하여 민족 해방 운동에 전념하였다.
전 참판 홍승헌·홍경식 부자, 전 참판 정원하, 그리고 전 군수 정안립과 전 육군정위 신팔균 등은 서간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 홍경식은 서간도에서 3·1운동에 참여하고 한족회 간부로서 활약하였으며, 정안립과 신팔균은 여준·김좌진 등 39명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신팔균은 서로군정서·신흥무관학교 등지에서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일제의 가혹한 무단 통치로 국내의 독립운동은 큰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제약 속에서도 오상근·신팔균 등은 비밀 결사인 대동청년단을 조직하여[1909] 국권 회복 운동을 전개하였고, 오상근은 장로교 조사로서 기독교 중심의 3·1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엄주동은 서울에서 조선산직장려계(朝鮮産織獎勵契)[1915]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투옥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진천 지역 각 읍과 면에서 이상직·윤병환·이영호·신영희 등과 진천성공회·진천감리교의 전도부인, 그리고 천도교 교인 등 군민 수천 명이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으며[3월 15일, 4월 2~3일], 진천성공회 신도로 경성고보[지금의 경기고등학교] 학생 홍순복과 중앙고보[지금의 중앙고등학교] 학생 조명희, 그리고 청주농업학교 학생 박승하는 각기 서울과 청주에서 3·1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0년대 민족 독립운동]
3·1운동을 계기로 민족의 대표 기구로서 독립운동을 지도·통할해 나갈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수립되어 활동의 중점을 민족 운동의 통할과 국제 외교에 두고 활동하였다. 임시 정부가 평화적 독립운동을 펼치고 있는 동안, 만주 지방에서는 무장 독립군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신팔균은 청산리대첩 이후 대한통의부[1922~1924]의 조직, 군사위원장·의용군사령관으로 무장 독립 운동을 하다가 순국하였고[1924], 그의 부인 임수명도 통의부 단원으로 활동하다가 남편의 순국 소식을 듣고 자결하였다.
3·1운동에 참가했던 조명희는 1925년을 전후하여 카프(KAPF)[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를 조직하여 중앙위원으로서 항일 민족 해방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8년 소련으로 망명해서는 조선사범학교 교수, 소련작가동맹 맹원, 『선봉』의 주필 등을 지내면서 민족 교육과 민족 문화 수호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결국 1937년 소련 정부에 의해 투옥·숙청되었다가 1956년 복권되었다.
국내에서는 진천공립보통학교[지금의 상산초등학교] 학생 임상철·정운갑·이호영 등이 주도하여 전교생이 항일 동맹 휴학을 하였다[1926년 10월 상순, 3일간]. 광주 학생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청주에서도 청주농업학교 학생의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이때에 지금의 진천군 진천읍 건송리 출신 강혁선이 청주농업학교 재학생으로 참여하여 검거·수감되었다.
1928년 2월 6일에는 일제강점기에 가장 규모가 컸던 반일 사회 운동 단체인 신간회(新幹會)[1927년 2월~1931년 5월]의 진천지회가 설립되어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부서와 간부진을 보면 회장 안석응, 부회장 강태응, 서무부총간 권태호, 재정부총간 ○행○, 정치문화부총간 이정희, 조사부총간 한상혁, 선전부총간 이규석, 간사 문학성·장순춘·송헌○·김○도·채길병·유경목·박종영·박성희·이상규·고응숙 등이었다.
[1930년대 이후 민족 독립운동]
1930년 1월 광주학생운동이 서울까지 파급되자 진천 출신인 채수복은 협성실업학교 학생으로 독립 만세 운동을 하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옥중 순국하였다. 박기성은 중국에서 무정부주의자 연맹인 남화한인청년연맹을 조직하였으며, 1938년에는 한국전지공작대를 창립하여 간부로 활약한 후 1941년 한국광복군 제5지대의 분대장으로서, 그리고 총사령부에 전입되어 8·15광복 때까지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유재복과 오상근(吳相根)은 중경의 광복군 총사령부 경위대에 입대하여 토교대에 배속되어 정부 요인들의 신변 보호와 그 가족들의 경호를 맡는 등 독립운동을 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