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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1788
한자 壬辰倭亂
영어음역 Imjinwaeran
영어의미역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이칭/별칭 7년전쟁,분로쿠 게이초[文祿慶長]의 역(役),만력(萬曆)의 역(役)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수덕

[정의]

1592년에서 1598년 까지 2차에 걸쳐 일본이 조선을 침입하여 일어난 전쟁.

[개설]

1587년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내부의 정치적 분란을 해소하고, 국제교역상의 불리를 타파하기 위해 중국 침입을 통한 체제 변혁전쟁을 구상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선에 가도입명(假道入明)을 요구하면서 1592년 4월 13일 부산포 상륙을 시발로 하여 조선 침략을 시작하였다. 조선은 관군과 지역 각처에서 모집된 의병 등이 총력전을 펼쳤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명(明)이 개입하여 조선과 연합군을 형성, 일본에 대항하는 한편, 일본과의 전쟁 화의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전쟁 중 계속되던 강화회의가 1596년 결국 결렬되면서 1597년 일본의 재차 침입이 이어졌고[정유재란(丁酉再亂)], 1598년이 되어서야 전쟁은 끝이 났다.

경상도는 임진왜란 기간 동안 일본군이 제일 먼저 침입하여 피해가 컸던 지역이었다. 일본군은 김해, 칠원, 창원 등을 함락하였고, 거제 등 도서지방과 고성, 진해 등 연해 지역에 진출하였으며 이에 대항하여 옥포해전(玉浦海戰)과 합포해전(合浦海戰) 등이 연이어 일어났다. 또한 경상우도 병마의 주력이 진주에 있다고 결론지은 일본군은 진주성의 함락을 이 지역 공격의 핵심으로 삼게 되면서 진주에 많은 병력을 주둔시켰고, 결국 1, 2차 진주성전투가 일어나게 되었다.

[진주성전투]

1592년(선조 25) 8월에 진주목사로 취임한 김시민(金時敏)은 9월 고성과 창원을 공격하여 일본군을 내쫓았다. 그러자 김해성에 있던 일본 장수인 가토[加藤光泰]·하세가와[長谷川秀一] 등은 2만여 명의 대병력을 거느리고 경상우도의 조선주력군이 있는 진주성으로 향했다.

일본군의 진격소식을 들은 경상우도순찰사 김성일(金誠一)김시민을 독려하고, 곤양군수 이광악(李光岳)과 진주판관 성수경(成守慶), 전만호(前萬戶) 최덕량(崔德良) 등과 협력하여 일본군에 맞섰다. 김시민이광악은 3,800여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대항하였다. 여기에 의병들이 가세해 일본군을 물리쳤다. 이 싸움은 소수의 병력으로 일본군의 대병력을 물리친 대승으로서 한산도대첩, 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로 꼽힌다.

[의병의 활동]

전쟁 중 전직관료 및 유학자, 농민들이 주축이 된 의병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전쟁 중 의병이 가장 먼저 일어난 지역은 경상도로, 선봉장은 의령(宜寧)의 곽재우(郭再祐)였다. 이 외에도 합천의 정인홍(鄭仁弘), 고령(高靈)의 김면(金沔) 등도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경상우도 지역의 전투에서 승리했다.

진주전투 때에도 의병들의 역할은 핵심적이었다. 곽재우를 비롯한 정유경(鄭惟敬)·김준민(金俊民)·정기룡(鄭起龍)·조경형(曺慶亨)·최경회(崔慶會)·임계영(任啓英)·김천일(金千鎰) 등은 관군과 힘을 합해 진주성 함락을 저지하고 일본군의 군사력을 크게 약화시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진주여인들의 수난과 항거]

임진왜란 중 조선의 민간인들은 일본군에 의해 많은 피해를 입었으며, 특히 부녀자들은 폭행, 살상, 납치 등의 수난을 겪었다. 이 와중에서 조선 여인들은 일본군을 피해 달아나거나 죽음으로써 정절을 지키기도 하였고,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의연히 일본군을 꾸짖거나 은장도로 강렬하게 저항하기도 하였다. 『진양지(晋陽誌)』의 「열녀조(烈女條)」에 이름이 올라 있는 상당수의 진주 여인들도 임진왜란 중 일본군에게 죽음으로써 정절을 지키고, 항거한 인물들이다. 죽음을 불사하고 진주 남강에 뛰어들어 일본 장수를 수장(水葬)시킨 논개도 일본군에 강렬하게 저항한 진주 여인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또, 진주성전투 중에 많은 진주 여인들이 끓는 물을 성 밑으로 부어 일본군을 공격하거나, 식량을 조달하고 부상자를 치료하는 등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기도 하였다.

[전쟁도구]

임진왜란 때 사용된 전쟁 무기 및 도구로는 조선 전기 이래의 전통적인 무기들이 다양하게 활용되었지만 일본이나 명나라의 선진 화기(火器)를 도입하기도 하였다. 특히 원래 서구에서 개발된 조총(鳥銃)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우리나라에 전해졌다. 임진왜란 초기에 일본군의 화기와 전술에 연패를 당한 조선군은 새로운 화기의 도입이 필수적임을 깨닫고 전리품을 활용하거나 항복한 일본군 중 조총 제조기술을 지닌 자들을 활용하여 조총 개발에 힘을 기울였다. 진주성전투의 맹장이었던 김시민이순신, 김성일 등과 더불어 일찍이 전통적 화기인 승자총통을 능가하는 화기로 조총을 주목하고 그 제작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고 한다.

이 외에도 전라도 김제에 살고 있었던 정평구(鄭平九)가 바람을 타고 공중을 날아다니는 수레인 비거(飛車)라는 도구를 만들어 진주성전투에서 외부와의 연락을 하는 데 활용했다고 한다.

[전쟁포로]

일본은 전쟁 동안 수많은 인적, 물적 자원을 약탈해 갔다. 특히 정유재란 때에는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으로 납치되어 갔으며 이 중에는 진주 사람들도 많았다. 진주에 살던 선비 조완벽(趙完璧)은 정유재란 때 일본에 납치되어 가서 교토의 무역 상인에게 고용되어 안남(安南)[지금의 베트남], 여송, 유구국 등을 돌아 다시 진주로 돌아왔다고 한다. 1593년의 진주성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던 홍호연(洪浩然)은 일본에 가서 학문과 서예로 널리 알려졌고 죽을 때까지 일본에 살았다. 진주 본관인 강항(姜沆)도 정유재란 때 일본에 포로로 끌려가 약 2년 8개월 동안 체류하면서 일본 에도[江戶]유학의 창시자인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와 교류하며 조선의 주자학을 전해주었다.

[결과]

진주는 관민이 합심한 강렬한 항거에도 불구하고 1593년의 2차 진주성전투 때 함락되었다. 이로써 진주는 성내외의 사망자 수가 약 6, 7만에 이르는 비참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군도 손실이 적지 않았다. 진주성전투로 인한 막대한 병력손실과 전력의 약화는 사실상 일본군의 호남공략의 목적을 좌절시켰다. 전란의 피해를 막고 일본군을 무력화시켜 전쟁을 종결시키는 데 진주의 관군과 민, 의병들의 활약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랜 전쟁으로 조선은 농토가 황폐해지고, 국가 재정이 어려워지면서 기존의 경제, 군사, 정치, 신분 제도 등이 동요하였다. 한편,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막부가 들어서고, 중국에서는 명·청 왕조가 교체되는 등 동아시아 국제 정세가 크게 변화하였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1.07.01 2011년 한자(문) 재검토 작업 <인명 검색어='' 유형='성명'>전만호(前萬戶)</인명> ->전만호(前萬戶) 인명이 아닌 이전의 관직명으로, 인명 태깅을 해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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