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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700006
한자 歷史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집필자 김영준

[정의]

선사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의 역사적 내력.

[선사~고대]

인천광역시 미추홀구는 인천 일대에서도 역사가 오래된 곳 중 하나이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1927년에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학익동 옛 소년 교도소 서쪽 언덕 위에서 조선 총독부 박물관에 의해 발굴된 고인돌을 통해 이미 선사 시대부터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고구려에서 남하한 비류(沸流)가 동생인 온조(溫祚)와 떨어져 자리 잡은 미추홀(彌鄒忽) 역시 지금의 문학산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즉 인천의 고대사를 열고 미추홀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계기가 된 지역이 바로 지금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였던 것이다. 이후 미추홀은 곧 비류의 죽음과 함께 온조가 세운 백제의 세력권으로 편입되고 한동안 역사 기록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이후 역사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는 없지만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에 의하면 “본시 고구려 매소홀현(買召忽縣)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소성(邵城)으로] 개명했다.”는 기록을 보면 고구려와 백제와의 전쟁 중에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되었으며 이후 신라가 당나라와 손잡고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신라 경덕왕소성현으로 개명된 것을 알 수 있다. 이 때 소성현은 옛 시흥군 일대에 있었던 율진군의 영현으로 존재했으며 이는 고려의 후삼국 통일 때까지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 시대]

고려 시대에 이르러서 한동안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의 위상에도 큰 변화는 없었다. 다만 1018년(현종 9)에 지금의 부평 지역에 해당되는 수주(樹州)의 속현으로 행정 구역의 변화가 있었을 뿐이다.

그러다가 고려 시대에 이르러 지금의 인천광역시 연수구 연수동 지역에 자리 잡은 인주 이씨(仁川李氏)가 7대에 걸쳐 왕비를 배출하는 외척 세력이 되면서 다시 한 번 역사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김은부에게 시집간 이허겸의 딸이 낳은 손녀들이 고려 덕종(德宗)정종(正宗), 문종(文宗)의 왕비가 되면서 왕실과 인연을 맺기 시작하여 손자 이자연(李子淵)의 세 딸이 모두 문종(文宗)의 비가 되는 등 인주 이씨 가문의 여성들이 고려의 왕비가 되었다. 이로 인해 왕실의 외척으로서 인주 이씨는 고려 시대의 대표적인 세도 가문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급기야는 이자연의 손자 이자겸에 의한 왕위 찬탈 음모가 벌어지고 이는 곧 이자겸의 난으로 이어진다. 결국 이자겸이자겸의 가문은 숙청되고 이자겸의 딸들도 모두 폐비가 된다.

이렇게 인주 이씨가 왕실의 외척이 되면서 지금의 부평 지역의 속현이었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는 고려 숙종(肅宗) 때는 왕의 외가라고 하여 수주의 속현에서 경원군(慶源郡)으로 승격되었고, 고려 인종 때는 인주(仁州)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1390년(공양왕 2)에는 ‘7대 어향(御鄕)’이라 하여 경원부(慶源府)로 승격되기까지 하였다. 자료 부족으로 당시 사정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지금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는 『고려사(高麗史)』 「지리지」에 보면 인주로 승격되었을 때 속도(屬島)로서 자연도·삼목도·용류도가 있었고 당성군과 재양현이 속해 있었다고 하여 규모가 커진 인천의 중심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

공양왕에 의해 승격된 경원부는 조선 시대에 들어서 1392년(태조 원년)에 다시 인주로 강등되었다가 1413년(태종 13)에는 지방 제도 개편과 함께 군이나 현에 ‘주(州)’자가 들어 있는 고을은 주(州)자 대신 ‘산(山)’자나 ‘천(川)’자로 고치게 하였기 때문에 인천군으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1460년(세조 6)에 인천은 세조비(世祖妃) 정희 왕후 윤씨의 외향이기 때문에 도호부로 승격되고 지금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관교동에 관아가 자리하게 되면서 사실상 조선 시대 인천의 중심이 된다. 특히 세조의 친어머니인 소헌 왕후(昭憲王后)의 아버지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沈溫)의 외가가 지금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관교동 일대에 살았던 인천 문씨(仁川門氏) 집안으로 전해지는 등, 인천광역시 미추홀구는 간접적으로 조선 왕실과도 인연을 맺게 된다.

하지만 1883년에 인천항이 개항되자 정부가 개항장인 지금의 인천광역시 중구에 인천부의 행정을 맡는 감리서(監理署)를 설치하고 부(府) 관아의 소재지를 지금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관교동에서 지금의 인천광역시 중구 내동으로 옮겨 버리면서 지금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인천의 중심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그리고 1903년에는 아예 개항장 일대만을 관할하는 부내면이 새로 생김에 따라 지금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지역은 수백 년 동안 누려온 인천의 중심지 역할을 인천광역시 중구 쪽으로 완전히 넘겨주게 된다.

[광복 이후]

광복 이후 1947년 4월에 미군정은 인천부 주안 지청을 설치해 인천부 도화 1동 등 9개 동을 관할케 했다. 이는 곧 이듬해인 1948년 8월에 인천시 남동 출장소, 문학 출장소, 주안 출장소 등 3개 출장소가 공식 출발하는 것으로 이어져 오늘날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의 기틀이 된다. 이 3개 출장소는 1956년 11월에 인천시 남부 출장소, 남동 출장소, 문학 출장소, 주안 출장소로 분할되었다가, 1967년 3월에 법률 제1919호로 「인천시 구(區) 설치에 관한 법률」이 공포된 뒤 1968년 1월 1일에 출장소들이 하나로 합쳐지며 인천시 남구가 생기게 되었다.

그 뒤 시세(市勢)가 확장됨에 따라 1988년 1월 1일에 대통령령으로 신설된 이중 13개 동을 인천시 남동구에 떼어주게 된다. 그러나 그 뒤로도 인구는 계속 증가했고, 마침내 인천직할시가 인천광역시가 된 1995년 3월 1일에는 신설된 인천광역시 연수구에 8개 동을 다시 떼어줘 23개 동만 남게 됐다. 그러다 1996년 3월에 인천광역시 남구 관교동인천광역시 남구 문학동이 나뉨에 따라 모두 24개의 행정동을 갖추게 되었다.

조례 947호에 의거 2009년 2월 1일 숭의 1동과 숭의 3동을 숭의 1·3동으로, 용현 1동과 용현 4동을 용현 1·4동으로, 도화 2동과 도화 3동을 도화 2·3동으로 3개 동을 통합하여 21개 행정동이 되었다. 2018년 3월 20일 법률 제15499호로 「인천광역시 남구 명칭 변경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어 동년 7월 1일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출범하였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9.10.15 인천도호부 청사->인천도호부 관아 문화재 명칭 변경으로 인한 문장 교정 청사가 자리잡게 -> 관아가 자리잡게 부(府) 청사의 소재지를 -> 부(府) 관아의 소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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