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06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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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開港期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하지영 |
[정의]
1864년부터 1910년까지 시기 경상남도 밀양 지역의 역사.
[개설]
밀양군은 경상남도 북동부에 자리한 지역이며, 조선시대 밀양도호부(密陽都護府)였으나, 1895년 지방관제 개정으로 대구부 밀양군이 되었다가, 1896년 경상남도 밀양군으로 되었다. 1906년 월경지 정리에 따라 비입지(飛入地)인 고미면이 경상북도 청도군으로 이관되었다.
[개항기의 밀양]
지리적으로 내륙에 위치한 밀양은 개항장이나 개시장과 같은 주변의 도시들에 비하여 개항의 충격을 크게 받지는 않았다. 하지만 서구의 근대적인 문물들이 들어오면서 밀양도 조금씩 변화하였고 근대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이러한 변화는 1905년 밀양을 통과하는 철도가 개통되면서 더욱 가속화되었다. 부산과 경성을 연결하는 경부선 철도가 시내 중앙부를 관통하면서 밀양에는 밀양역(密陽驛), 유천역(楡川驛), 삼랑진역(三浪津驛) 등 3개 역이 설치되었다. 곧이어 밀양의 삼랑진과 마산을 잇는 마산선이 개통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부산, 대구, 울산, 김해, 창원, 창녕을 통과하는 도로도 정비되기 시작했다. 밀양은 영남 교통의 중심도시가 되었다.
철도가 부설되고 도로가 정비되면서 밀양으로 진출하는 일본인 수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당시 밀양에 정착한 일본인의 수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1910년경에는 약 1,500명까지 늘어났다. 일본인의 진출과 함께 밀양헌병분견소[1899], 밀양우편취급소[1906], 조선통감부재판소 밀양검사분국[1909] 등의 관공서를 비롯하여 은행, 학교, 상점 등 근대적 시설들도 만들어졌다. 밀양의 일본인 대부분은 경부선 밀양역을 중심으로 한 가곡리(駕谷里) 일대에 거주했는데, 밀양역 주변으로 일본인 주택과 상점 등이 들어서면서 일본인 시가지가 조성되었다. 일본인의 영향력은 점차 밀양강 넘어 밀양 읍내로까지 확대되어 갔는데, 조선인 거주지를 구획 짓던 밀양읍성(密陽邑城)도 1910년경부터 철거되기 시작하였다.
이 외에 일본인들은 농촌 면 지역에 정착하면서 대규모 농장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특히 낙동강과 밀양강 주변 비옥한 저습지·황무지 등의 개간에 적극적이었다. 대표적인 사람이 히로시마현[廣島縣] 출신의 유아사 본베이[湯淺凡平]이다. 유아사는 1905년 상남면(上南面) 일대의 토지를 개간하여 ‘유아사무라[湯淺村]’라는 일본인 이주 농촌을 조성하였는데, 유아사무라에는 후쿠오카현 출신의 노세 히로요시[野瀨廣吉], 오카야마현 출신의 마쓰시타 데이지로[松下定次郞]까지 합류하였다. 1909년에는 마쓰시타를 중심으로 밀양수리조합(密陽水利組合)을 조직하여 상남면 일대의 미간지를 개간하였다. 유아사 본베이, 노세 히로요시, 마쓰시타 데이지로는 일제강점기 밀양 일본인 사회의 중심 인물로 성장하였다.
개항 이후 일본인의 밀양 진출과 토지 침탈이 가속화되자 밀양 조선인들의 저항도 거세어졌다. 1907년 밀양 연계소(蓮桂所)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 1908년 백운하(白雲下) 등 밀양 출신 의병들의 항일운동, 1909년경의 밀양수리조합 건설 저지 투쟁 등이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