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600964 |
---|---|
한자 | 張喚 |
영어음역 | Jang Hwan |
이칭/별칭 | 유신,용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정성미 |
[정의]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흥성(興城). 자는 유신(幼新), 호는 용계(龍溪). 고려 태사 충헌공 장길(張吉)의 후손이며, 할아버지는 장숙(張叔), 아버지는 공조판서 장승세(張升世)이다. 어머니는 연안김씨(延安金氏)로, 장사랑 김승업(金承業)의 딸이다.
[활동사항]
장환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쓰고 충효를 인륜의 으뜸으로 알았다. 그는 1612년(광해군 4) 30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624년(인조 2)에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의병을 이끌고 여산에 이르렀으나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냥 돌아왔다.
1627년(인조 5)에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국왕은 강화로 피난하고 세자는 남쪽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는 도체찰사 이원익·신흠 등과 함께 동궁을 모시는 데 정성을 다했다. 3월에 다시 서울로 돌아와서 척화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또한 그해 이인거의 난이 일어났을 때에는 홍보·이계남 등과 함께 적을 쳐서 소무일등공신에 녹훈(錄勳)되었다.
1628년(인조 6)에 유효립의 난이 일어났을 때에도 월사 이정구, 청음 김상헌 등과 함께 힘을 다하여 평정하여, 영사원종공신(寧社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그 후 도사에 제수되었고, 좌랑을 거쳐 장성의 수령과 평양윤을 지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그는 어버이 상을 당하여 상복을 입고 있던 중이었는데도, 곧바로 남한산성에 달려가서 인조를 호종(扈從)하였다. 그때 한강물이 얼어서 건너기 어렵게 되자 직접 인조를 업고 건너서 함께 따르던 사람들이 모두 경탄하였다. 얼마 후에 화의가 맺어지자 그는 이때부터 문을 닫고 자취를 감추었으며, 후학을 가르치면서 살다가 여생을 마쳤다.
[상훈과 추모]
그가 죽은 뒤 조정에서는 호조참판의 증직(贈職)을 내렸고, 충숙공(忠肅公) 이상길의 사우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