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02740 |
---|---|
한자 | 朝鮮-精神-胚胎-畿湖禮學 |
영어의미역 | Giho Confucianism Germinated Scholarly Fidelity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문준 |
[개설]
충청남도 논산은 17세기 조선 선비 문화의 중심지이다. 기호학파의 중심지이며, 선비 문화를 집약적이고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유교 문화 자원이 많은 곳이다. 특히 논산은 한국 예학의 중심지로서, 조선조 예학과 산림 인사들의 거점이며 조선의 예학을 주도했던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과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1574~1656)의 유서와 전통이 깃든 곳이다.
특히 한국 예학을 대표하는 김장생은 논산의 대표적인 예학자이다. 김장생은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의 수제자이다. 한국 예학의 대표 학자로서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김집의 아버지이자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의 스승이다. 이들 송시열과 송준길은 모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국가 정신과 사회 발전의 방향을 정립한 주인공들이며, 스승인 김장생의 삶과 사상은 17세기 이후 한국 선비들의 예론과 의리 실천의 전형을 이루었다.
[조선 후기 예학의 발전 배경]
예학은 조선 후기에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루었다. 예(禮)는 유교 사회를 유지하는 근간으로서, 조선시대에는 국가적으로 예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였고, 사대부들의 사상적 기반인 도학 정신은 예제 질서를 통하여 실현된 것이었다. 성리학과 예학을 바탕으로 한 유교 문화는 정신과 학문과 가치관을 중시하는 문화로서, 자기 수양의 정신 자세 및 도의와 염치를 알고 도덕을 몸으로 실천하는 선비 문화를 만들어냈다.
특히 17세기 예학은 종래의 가례(家禮) 시행을 위한 이해 차원에서 발전하여 예제를 철저하게 고증하기에 노력하였다. 이러한 연구에 의하여 예의 근본 정신을 이해하는 한편, 조선의 당시 상황에 합당한 예제의 정립을 추구하기도 하였다. 예학의 바탕 위에 도학자들은 몸소 엄격하게 예를 실천하였으며, 당시의 불합리한 예제를 비판하고, 상황과 현실에 맞도록 주체적으로 예제 질서를 수정하는 데 이르렀다. 이로써 그들은 성리학을 실천의 학문으로 승화시켜, 실천 유학으로서의 본래 면목을 발휘하게 되었다.
조선 후기 예학의 발전은 성리학 발달과 시대 상황에서 연유하였다. 17세기 예학의 발전은 16세기 성리학 발달의 자연스러운 결과이며, 왜란과 호란으로 인한 사회불안, 그리고 왕실의 전례(典禮) 논쟁으로 인한 파급 효과에 의해 이루어졌다. 성리학에 입각한 17세기 예학 정신은 천리(天理)에 따르는 예제의 확립을 추구하며, 성리학의 바탕 위에 예의 형식적 준행이 아니라, 의식적이고 자율적인 준행을 추구하였다. 따라서 성리학과 예학은 이론과 실천의 관계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당시의 조선 사회는 왜란과 호란으로 신분제가 동요하고 윤리도덕이 땅에 떨어졌다.
이에 사대부들은 무너진 가치관과 윤리의식을 회복하여 강상(綱常) 윤리를 재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그들은 기존의 예제와 예 정신을 더욱 엄격히 강조하였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종법에 기초한 『주자가례(朱子家禮)』를 깊이 연구하고 생활화하여 유교적 사회를 재건하고자 했다. 또한 인조대의 원종추숭(元宗追崇) 문제와 현종대의 자의대비(慈懿大妃) 복상 문제 등 왕실의 전례 문제가 계속 일어나 조신(朝臣)들뿐만 아니라, 전국의 유림이 전례 논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기호 예학의 대표자 김장생]
17세기의 대표적인 예학자로는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 사계 김장생, 신독재 김집,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 동춘당(同春堂) 송준길(1606~1672), 우암(尤庵) 송시열(1607~1689),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 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 1607~1684), 시남(市南) 유계(兪棨, 1607~1664),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 1631~1695), 도암(陶庵) 이재(李縡, 1680~1746) 등이 있다. 당시의 예학은 크게 두 계열로 나뉘어 발전하였는데, 하나는 김장생과 그 문하의 예학이고, 다른 하나는 정구와 그 문하의 예학이다.
충청남도 논산 지역의 연산에서 학문과 교육 활동을 하던 김장생은 예학 발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여 조선 예학의 종장(宗匠)으로 일컬어지는 학자이다. 김장생은 율곡 이이와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 1534~1599)에게 배워 성리학으로 예학의 바탕을 마련하고, 정밀하게 예를 고증하는 데 힘써 예학의 학문적 기초를 수립하였다. 김장생이 조선 예학의 일대 종사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는 예학에 대한 업적이 지대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학문적 업적에 앞서 거경준례(居敬遵禮)로 일관된 학행(學行)이 일대의 모범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 그의 문하에서 당대의 예학자가 많이 배출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조선 예학사에 있어 김장생의 위치는 예학을 학문적 위치에 올려놓은 점에 있다. 그의 예학은 종래 예학이 각종 의례를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한 실용적 연구에 지나지 않던 것을 학술적 연구로 한 단계 끌어올린 것이었으며, 무의식적인 가례 준행을 의식적으로 실천할 수 있도록 학문화한 것이다. 그는 또 정밀한 고증을 통하여 예 시행을 뒷받침하는 본원을 정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김장생은 예를 시행하는 데 있어 의식적이고 체계적으로 실천하도록 하는, 실천을 통한 진리 인식을 중요하게 여겼다. 즉, 예제를 실천하여 진리를 체득해가는 과정을 중요시했다.
김장생이 저술한 『가례집람(家禮輯覽)』과 『의례문해(疑禮問解)』는 조선의 예서 가운데 학문적 여건을 구비한 시발점이었으며, 예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방향을 제시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김장생이 예에 관한 연구를 학문의 위치로 올려놓은 후에는, 종래에 예를 경(經)의 일부로 여겨 학문 영역을 경사(經史)로 구분하던 것에서 경으로부터 분리하여 경·사·예가 각기 학문의 한 분야를 이루게 되었다. 다만 예학 분야가 특별히 중시되었던 점은 분명 이 시대의 학문적 특성이다.
[기호 예학파의 가례 연구]
조선 후기 예학의 전범은 『주자가례』였다. 『주자가례』는 고려 말에 수입하였지만, 16세기에 이르러서 이 책에 대한 검토를 통해 성리학에 입각한 조선의 독자적인 가례를 수립하는 노력이 시작되었다. 17세기에 이러한 노력이 본격화되었다. 조선 초에는 예의 본질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보다는 법제와 의례를 제정하고 이를 국가적으로 시행하는 일이 당면 문제였다.
따라서 가례보다는 국가 법제의 제정과 시행에 노력을 기울여왔다. 조선 건국 후 새로운 사회 질서의 재편성과 함께 종래의 불교 의례에서 벗어나 유교적 의례를 정립해야 했기 때문에, 예에 대한 도덕적인 의의를 찾기에 앞서 법제를 시급히 완성하고 시행해야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국가 전례가 국가 차원의 문제였고 그 적용이 강제성을 지녔다면, 가례 시행은 처음부터 강제성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명종·선조대 이후 점차로 성리학이 깊이 연구되고 체계화되자 예에 대한 인식이 전환되어 맹목적 준용에 그치지 않고 예제 자체에 대해 검토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의 시대적인 특수 상황에 따라 예제를 자기화하는 단계에 이르렀는데, 이는 가례를 합리화하고 토착화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대부들은 가례의 예제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소학』과 향약(鄕約)의 보급을 통해 이를 지역 향촌사회와 국가 전반에 걸쳐 적용하고자 했다. 김장생과 그의 제자들은 이러한 노력에 앞장선 인물들이었다.
[가례 시행에 모범을 보인 기호 예학파]
17세기 이후에는 왜란과 호란을 계기로 붕괴되기 시작한 사회질서의 재편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현안이었다. 이에 대해 사림은 예교(禮敎)를 통해 종법적 예질서를 확립하고 이를 민중이 따르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급선무라고 인식했다. 그리고 가례를 단순한 예제의 하나가 아니라, 국가·사회·가정을 유교적인 것으로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중요한 것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가례를 국가 사회 전반에 걸쳐 시행하는 것이 역사적 과제였으니, 가례의 시행을 중요한 과제로 삼은 가례 연구서들이 쏟아져 나왔다. 가례 시행에 관하여 조선 성리학자들이 갖는 중요한 문제 의식은 『주자가례』와 조선의 시속(時俗) 사이에 발견되는 차이를 조율하고 보완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주자가례』를 보완하는 기준이었다. 17세기까지의 조선 성리학자들은 대체로 “의례(儀禮)를 경(經)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희의 입장을 받아들여, 『주자가례』의 보완은 고례(古禮)의 근본 정신을 실현해야 한다는 공통된 입장을 전개하였다. 고례의 근본 정신을 바탕으로 『주자가례』에서 미흡한 부분이나, 중국과 다른 조선의 시속(時俗)을 정당화함으로써 예제 실행의 근거를 제공하여 실천 가능성을 높이고자 했다. 이러한 노력의 대표자들이 논산 지역에서 활동한 김장생과 김집이며, 그들이 가르친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유계, 윤선거 등이 그러한 학문을 계승하였다.
[가례의 보편성과 왕실례]
17세기 예학의 특성은 가례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였다는 점이다. 조선 후기에는 사대부들이 『주자가례』에 주목하면서 이에 대한 많은 저술을 편찬했다. 그러한 저술은 『주자가례』의 보급과 실행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수록된 예제에 주석을 달고 해석을 가하면서 나름대로의 견해를 피력하고 재편하기도 하는 수단이었다. 그리하여 김장생과 제자들은 예학을 학문화하여, 종래에 가례 준행을 위해 예를 이해하던 수준에서 벗어나 예의 본원을 정립하는 연구로 심화하였다. 예에 대한 본원적 의미도 모르면서 예를 준행하기에 급급하여 고식적으로 형식화하는 폐단을 막기 위해 예의 본원적 의미와 실천의 당위성을 규명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자연스럽게 고례(古禮) 연구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가례에 대한 검토는 가례의 근본적 질서 체계인 종법 자체에 대한 관심이었다. 김장생과 제자들은 종법제도와 그 적용에 있어서 자유로운 질의와 토론을 전개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주자가례』에 기초한 생활의 예를 정립하게 되었다. 당시 사대부들은 왕실례(王室禮)와 별개로 가례를 연구하면서 가례에서 보편적 질서 기준과 규범의 논리를 찾고자 하였고, 이로써 가례를 사대부들만의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 의례의 근거로 정립하려고 하였다.
인조대의 추숭 문제와 현종대의 복제 문제에 대한 논쟁을 통하여 사림들은 고례에서부터 당송대(唐宋代)의 예와 예론들을 섭렵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가례의 보편성을 추구하였다. 김장생과 제자들은 당시의 예 논쟁 과정에서 가례로 왕실례를 포함할 수 있는 논리를 전개해나갔다. 이들은 가례가 인간 누구에게나 적용되어야 할 보편적 규범으로서, 사대부뿐만 아니라 천자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예라고 여겼다.
[예학의 근본 정신]
김장생과 제자들이 주도한 17세기 예학은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제거한다(存天理去人欲)’는 이기성정(理氣性情)의 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성리설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17세기 예학을 이해할 수 없다. 예학은 성리학의 ‘존천리(存天理)’를 철학으로 하여 천리의 ‘절문’을 밝히고, 사회적으로 적용하고자 하는 학문이다. 이(理)는 인간에게 내재하며, 이것을 객관적인 예제에 의해 행할 때 개인·국가·세계가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여겼다. 예학자들은 예가 단순히 외재적인 규범이 아니라, 인간에 내재하는 이(理)를 발휘하는 수단이라고 인식했다.
김장생과 제자들이 예학을 통하여 추구하는 바는 극기복례(克己復禮)를 통해 천인합일을 이루는 것이다. 극기복례는 인간 개개인이 이기심이나 욕심을 극복하고 사회의 객관적인 예제를 준행하여 사회의 안정과 조화를 이루며, 이러한 가운데서 개개인의 삶을 완수한다는 의미이다. 이를 예학자들의 표현대로 하자면 ‘사정(私情)을 억누르고 예를 따른다(抑情從禮)’는 것이다.
예는 자신의 명(名)과 분(分)에 넘치거나 허식이 있어서는 안 되며, 이는 극기라는 내성적(內省的) 수양 과정을 거쳐 사정과 사욕을 억제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극기를 통해 어질고 선한 자기 본성을 깨닫고, 이로써 스스로 자율 의지를 지녀야 한다. 자기를 극복하는 수련 자체가 예의 실천과정인 것이다. 극기 과정이 예를 실천하는 일상생활이 되기 때문이다.
[예학과 도학 정신]
예학은 예치 정신의 실현, 한국 도학파의 정통 계승, 예를 통한 자기 수양과 왕도정치 실현 등의 도학 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예학은 퇴락한 습속을 교정하고 기강을 진작시키며 백성의 고통을 혁파하기 위한 방법으로 강구되었다. 이러한 도학 정신에 입각하여 김장생과 제자들은 한국 도학의 계통으로 정몽주·김굉필·조광조·이황을 들고 특히 이이를 높였다. 김장생의 이러한 도통 정신은 특히 송시열이 이어받아 조선 후기 기호사림의 학문과 예학 사상의 기저를 이루었다.
또한 예를 통한 자기 수양을 강조하고 『소학』을 중시했다.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는 예학은 자기를 절제(節制)하여 본래의 마음을 회복하고 천리를 실현한다는 정신을 담고 있다. 김장생은 지속적으로 예를 행하는 삶을 통하여 자기 본성을 발휘하여 인생을 고양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김장생은 예는 천리에 근본하는 것이고 기강과 인도의 대단이라고 하였으며, 김집은 예라는 것은 인욕을 절제하고 천리를 보존하는 법칙이라고 하였다. 김장생은 예의 실천은 자기를 극복하는 수련 과정이라고 보았으며, 김장생 자신은 물론 그 문인들도 예행에 소홀함이 없었고 다른 이들의 모범이 되었다.
한편 김장생과 그 문인들의 예학 정신은 병자호란 이후 왕도를 높이고 패도를 반대하는 춘추 정신으로 발양되었다. 17세기 이후 예학 정신은 후대의 의리 정신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성리학에서 예는 의의 궁극적인 표현 방식이므로, 예학의 발전에는 그만큼 사회 정의에 대한 추구가 강하게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성리학을 통하여 인극을 세우고 진리를 내재화하여 인극을 행한다는 김장생의 진지 실천 정신은 송준길과 송시열 등을 비롯한 문인들에게 불굴의 인도 정신으로 이어져, 패도를 배격하고 왕도와 덕치를 추구하는 춘추 정신의 바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