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00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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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敎育 |
분야 | 문화·교육/교육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
집필자 | 이계형 |
[정의]
경기도 포천지역의 교육 관련 기관, 시설, 시책 및 역사.
[고려 시대·조선 시대]
경기도 포천지역의 첫 교육 시설은 1173년(명종 3)에 설립된 포천 향교[경기도 문화재 자료 제16호]와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 영평리에 창건된 영평 향교였다. 향교는 지방의 양반 자제를 교육하기 위한 교육 기관으로 고려 인종[1109~1146] 당시 처음으로 설립되었다. 당시 포천 향교가 어떻게 운영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조선 시대에 들어오면서 정상적으로 운영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 태조가 즉위한 후[1392] 각 도의 책임자에게 학교를 부흥하며 고과의 법을 세우도록 명한 뒤에, 그간 쇠퇴했던 향교가 지방 학교 구실을 수행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포천 향교는 지방 교육을 담당해오다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었다. 1594년(선조 27)에 중건하고 1916년에 중수했는데 6·25전쟁 때 다시 파괴되어 1962년 포천 유림에서 중수하였다. 포천 향교는 경기도 포천시 군내면 구읍리에 자리하고 있다. 포천 향교에는 공자를 위시하여 자사, 맹자, 언자, 회자 등 오성(五聖)과 정자(程子), 종조 사현(宗朝四賢),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등 18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영평 향교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었다가 1594년(선조 27) 중건하여 훈학과 향사 봉행을 병행해 오면서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구한말 이후 제향만 모셔 오던 중 1938년 폐철되었다. 그 터에 묘지가 조성되고 주변에 주춧돌과 계단석 관세대 등이 나뒹굴었는데 지역 유림들이 이를 안타깝게 여겼고, 2011년 12월에 포천 향교에서 영평 초등학교 안에 영평 향교 유허비를 건립하였다.
경기도 포천에는 또 다른 지방 교육 기관으로 3개의 서원이 사액되었다. 화산 서원[경기 기념물 제46호], 옥병 서원(玉屛書院)[향토 유적 제26호], 그리고 용연 서원(龍淵書院)이다. 화산 서원은 1631년(인종 9) 가산면 옥금동에 사우를 창건하여 이항복(李恒福)의 위패를 모시고 백사 서원(白蛇書院)이라 하였다가 4년 후 1635년(인조 13)에 지금의 화봉산 아래로 옮겼고 1659년(현종 10) 이곳 지명을 따서 화산(花山)이라 사액되었다.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971년 화산 서원 복원 추진회 주도하에 사업 추진 10년 만에 다시 건립되었다.
화산 서원 설립 28년 후인 1658년(효종 9)에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에 옥병 서원(玉屛書院)[향토 유적 제26호]이 건립되었다. 지방 유림인 박순(朴淳)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서였다. 1698년(숙종 24) 이의건(李義健)·김수항(金壽恒)을 추가 배향했고 1713년 ‘옥병(玉屛)’이라 사액되었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로 훼철되었는데 1978년 옥병 서원 복원 추진회를 결성하여 1980년 복원하였다.
마지막으로 1691년(숙종 17) 이사상(李師相) 등 남인계 유생들이 이곳에서 만년을 보낸 이덕형(李德馨)과 조경(趙絅)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신평리에 용연 서원(龍淵書院)을 창건하였다. 1692년(숙종 18) ‘용연(龍淵)’이라 사액을 받고 경기도 내 남인 세력의 유력한 근거지로 선현 배향과 향촌 교화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 시 훼철되지 않고 포천 지역에서 유일한 서원으로 존속하였다. 그런데 6·25 전쟁 당시 강당·동재(東齋)·서재(西齋) 등이 소실되어 현재는 사우(祠宇)만 남아 있다. 서원 철폐 후 교육 기관으로는 서당[글방]만이 남았다.
[개항기·일제 강점기]
개항 이후 근대 교육 기관이 각지에 들어서면서 한문 위주의 교육에서 벗어나 국어·산술·역사·지리 등 근대 교육으로 바뀌어 갔다. 포천의 근대 교육은 다른 지역보다 조금 늦은 1900년 10월 군수가 향청 옆에 학교를 설립하면서 비롯되었다. 그 학교는 같은 해 12월 포천 관립 소학교로 인허되고 서상우(徐相愚)가 부교원에 부임하면서 근대 교육의 싹을 틔워 나갔다. 하지만 정부의 재정 지원이 원활하지 않고 부교원의 임면이 거듭되면서 1904년경 폐교되고 말았다.
그 뒤 1906년 포천 유지인 이철용(李哲鎔)·조구식(趙龜植)·이명응(李命應) 등이 신야 의숙(莘野義塾)을 설립하고 심상·고등 양과를 개설하였다. 신야 의숙은 포천 향교의 토지를 자산으로 운영되었는데 한때 포천 유림들의 방해로 어려움에 처하기도 했지만, 1907년 9월 신야 의숙 제1회 졸업식을 치렀다. 이어 1907년 초 윤상현(尹商鉉)은 경기도 포천군 서변리[현 경기도 포천시 군내면 용정리]에 자기 논 12두락을 팔아 옥성 의숙(玉成義塾)을 설립하여 50여 명의 학생들을 가르쳤다. 1908년 9월 신야 의숙은 청성 제일 학교(靑城第一學校)로, 옥성 의숙은 청성 제이 학교로 각각 개칭되었다.
그 뒤 1908년 12월 대한 협회 서기였던 임헌재(任憲宰)가 경기도 포천군 군내면 좌의리에 청성 제삼 학교를 설립하였다. 이들 청성 학교는 설립자의 기부와 함께 향교의 토지를 재원으로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09년 4월 포천군·영평군 군민 수 천 명이 참여한 가운데 청성 제일 학교에서 영창 학교와 청성 3개교가 연합 운동회도 개최하였다.
1909년 예전 포천 향청으로 확장 이전한 청성 제이 학교는 1911년 9월 포천 공립 보통학교로 이어졌지만, 청성 제일 학교는 1개 군에 1개 공립 학교만 설치한다는 방침에 따라 폐교되었다. 청성 학교 학생들은 신설된 포천 공립 보통학교로 편입이 되었고 기존 교사였던 윤흥순·이해관 등은 임시 훈도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청성 제삼 학교는 1910년대 초까지 사립 학교로 계속 운영된 것으로 보이나 자세하지는 않다.
한편, 1907년 12월 경기도 영평군 영평리[현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 영평리]에 문을 연 영창 학교(永彰學校)는 1909년 영창 보통 학교로 정식 인가되었고, 1910년 4월 공립으로 개편되어 영평 공립 보통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1914년 영평군이 포천군에 병합되면서 영평 공립 보통학교는 포천 관할 하에 놓이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송우[1920]·일동[1922]·영북[1924]·내촌[1930]·관인[1930]·가산[1931]·이동[1933]·신북[1934]·청성[1935]·이곡[1938]·금주[1941] 등 보통학교와 포천 공립 보통학교 화현 간이 학교[1934], 송우 공립 보통학교 직동 간이 학교[1935], 궁평 보통학교 삼정 간이 학교, 신북 보통학교 외북 분교[1940] 등이 설립되었다. 그리고 1944년 4월 궁평 보통 공립학교 부설 삼정 간이 학교가, 포천 공립 보통학교 부설 화현 간이 학교가 각각 국민학교로 승격하였다.
[1940~1950년대]
1945년 해방 직후 남북 간에 3·8선이 갈리면서 포천군내 13개 초등학교 중에서 영북·영평·이동 등 3곳 국민학교가 북에 남게 되면서 인민 학교로 바뀌었다. 그 해 9월부터 학교들이 정상 수업이 이뤄지기 시작하였다. 1946년 창수 초등학교·선단 초등학교·외북 초등학교가 설립되었으며, 1947년 12월 포천군에 처음으로 중등 교육 기관인 포천 초급 중학교가 군내면 하성북리에 설립되고[현재 포천일 고등학교 자리] 1949년 11월 교사를 신축했지만, 6·25 전쟁 당시 전소되고 말았다.
그뿐만 아니라 포천군은 북한군이나 중공군의 주력 부대가 지나는 길목이었고, 격전장이 되면서 대부분의 학교 건물이 소실되었다. 교직원도 뿔뿔이 흩어져 학교로 복귀한 수가 얼마 안 되며 학생들 역시 가족과 가재의 피해가 막심하였다. 또한 귀중한 학교 법정 장부[동창회 명부, 생활 기록부철] 등의 소실로 학교 운영과 동창회 조직 운영에 애로가 많았다.
거의 폐허가 된 각 급 학교는 피난 갔던 교사들이 하나씩 돌아오면서 천막 교실이나 노천에서 수업하면서 교실 복구에 안간힘을 썼다. 더욱이 고향을 떠났던 주민들이 늘면서 학교도 제자리를 찾아 갔다. 휴전 협정 이후 UN군 관리 하 군정(軍政)으로 실시해 오던 청산면·창수면·영중면의 일부 지역과 영북면·이동면 전 지역의 미수복 지구 행정권이 1954년 11월 포천군 관리 지역으로 완전 수복되면서 영북 초등학교·영평 초등학교·이동 초등학교가 다시 포천군에 소속되었다. 그 결과 초등학교 수는 19개교, 분교장 5개소로 증가되었다.
이와 더불어 중고등학교가 신설 혹은 복구되었다. 1953년 3월 포천 고등학교에 중학교가 병설·운영되었고 1954년 9월 미 3사단 원조로 영북 중학교가 신축되었다. 이외에 관인 중학교·이동 중학교·포천남 중학교가 신설되었고 1957년 1월 이동 중학교가 일동 중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그해 4월 경기도 포천군 군내면 하성북리에 포천일 고등학교가 들어섰다. 포천일 고등학교는 1968년 12월 포천 종합 고등학교로, 1983년 6월 포천 실업 고등학교로, 2000년 9월 포천 종합 고등학교로 교명을 달리하다가 2006년 3월 예전처럼 포천일 고등학교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56년 사립 경북 중·고등학교와 포천 농림 기술 학교가, 1958년 11월에는 재단 법인 성민 학원 설립 인가를 받았다.
1956년 8월 교육 자치제 실시에 따라 교육 위원을 선출하여 포천 교육구 교육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초대 교육감에 권기하(權奇夏)가 선출되었다. 교육 위원회는 재해 복구에 주력하는가 하면 민심 수습과 자유 민주주의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특히 남하한 북한 주민들에 대한 정신적 지도 교육이 실시되었다.
[1960년대]
1960년대는 민족 주체사상을 회복한 시기로 ‘공부하는 학원’을 건설하여 ‘생산하는 교육’, ‘반공 교육’에 치중했던 시대였다. 각 급 학교는 ‘향토 학교’를 적극 추진했으며 1962년 2월 15일 제2차 교육 과정이 실시되면서 교과 활동·반공 도덕 생활·특별 활동 등 세 영역으로 교육 활동이 이뤄졌다. 이에 따라 각 급 학교는 ‘퇴비장’을 만들고 여름 방학 중에 목표량 달성을 위해 학생, 교사가 총동원되었다. 가을에 퇴비 목표량 심사를 하여 학교 급별로 표창도 하였다. 토끼장을 만들어 사육하고 묘목을 가꾸며 봉사 활동도 전개하였다.
1960년대는 ‘보릿고개’가 있었던 때라 각 초등학교에는 미국의 원조품인 강냉이 가루가 배급되어 큰 가마솥을 준비하여 아침부터 죽을 끓여서 점심 때 한 사발씩[그릇, 숟가락, 소금은 각자 준비] 학생 모두에게 나눠 주던 시절이기도 하였다. 당시 집에서 도시락을 준비해 오는 아동은 불과 10% 미만이었을 정도였다. 학교 급식은 1970년대 들어서도 포천 초등학교·송우 초등학교를 제외한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강냉이 가루 대신 밀가루가 교육청으로 할당되어, 1975년까지 제빵업자와 계약하여 빵 1개씩을 점심 대용으로 공급하였다. 이곡 초등학교는 ‘농촌 보건 위생 교육’으로, 청성 초등학교는 급식 연구 학교로 도 지정 연구 학교를 운영했으며 각 급 학교에서는 1인 1연구와 작품 전시[교육 자료]에 의무 참가하게 하는 등 교원의 연구 활동을 부추겼다.
초·중·고 할 것 없이 교실, 복도 등 환경 정리에 극성을 부리고 ‘교수-학습 지도안’도 ‘보도안’이란 이름으로 사전에 작성하여 교장, 교감의 결재 후에야 교단에서 활용되었다. 반공 교육의 강화로 학급에는 반공판이 설치되고 매일 한두 차례 이뤄지는 교직원 회의는 지시 사항 일변도로 경색되고, 비민주적으로 이루어졌으며 퇴근 시간도 없이 전기도 안 들어오는 교무실에서 호롱불을 켜고 계속되기도 하였다. 포천은 1970년대부터 본격적인 전화(電化) 사업이 시작되었다.
또한 1960년대는 중·고등학교의 입학시험이 있었기 때문에 우수 아동을 서울 등지의 명문 학교에 합격시키기 위해 각 학교들이 경쟁하였다. 입시 열기와 학부모의 교육열이 편승하여 포천에서도 각 급 학교는 학년 학급 가릴 것 없이 과외 공부가 성행하여 부교재인 참고서, 전과 지도서, 수련장 등이 교실과 학생들의 책가방에서 떠나지 않았다.
한편, 1960년대 노곡 초등학교·대회산 초등학교·정교 초등학교·백의 초등학교·산호 초등학교·지현 초등학교·보장 초등학교·보광 초등학교 등 초등학교가 신설되었고 포천 초급 중학교가 분리 개교되었다. 삼육 고등 공민학교, 청산 중학교, 영북 중학교와 더불어 포천 최초의 여자 중등학교인 포천 여자 중고가 신설되었다.
1963년 1월 시·군 단위의 교육구청이 폐지되고 교육 행정은 시·군청에 통합되었다. 1964년 1월 포천군 교육청이 개청하여 제1대 조상현 교육장이 취임하였다. 학교 사친회가 해체되고 기성회가 발족하여 학생들로부터 기성회비를 징수하였다. 포천군에서는 초등학교[년 300원]와 중등[년 2,000원]학교에서 처음으로 기성회비를 징수하였다.
[1970년대]
1970년대는 민족 주체 의식의 강화, 유신 체제 확립이라는 두 가지의 커다란 상호 모순적 이념 아래 1968년 12월 공포된 국민 교육 헌장의 개인 윤리, 사회 윤리, 국가 윤리의 정립을 위해 강압적으로 정신 개혁이 촉구되었다. 그리고 이를 위한 연수, 회의 등을 통해 정신 개조 차원에서 상달 하복의 지시가 엄격하였다. 또한 안보 교육이 강화되어 1971년부터 고등학교에 군사 훈련이 시작되었다.
새마을 교육으로 학교는 자활 학교를 만들어 생산을 고취하였다. 유실수 심기, 생울타리 조성, 향토 사회 조사, 성인 교실 운영, 학교 개방, 생산 교육 등 심지어 화단에도 콩을 심으라는 지시를 했고, 각 급 학교는 그 실적을 1일 보고하였다. 교육청은 새마을 교육을 점검, 독려했으며 민족 주체성 교육을 위해 국민 교육 헌장 내용의 주지와 실천을 강제하였다. 학생은 국민 교육 헌장을 달달 외우고 교직원은 내용 분석을 통하여 교육 과정과 연계 지도하고 연수, 연구가 강화되었다. 과학 기술 교육을 진흥시킨다며 각 급 학교에서는 탐구 수업이라 하여 AAAS, ESS, SCIS, SAPA 신 이론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1973년 과학 연구 학교로 포천 초등학교가 지정되었다.
1973년도에는 교육장이 중학교까지 관장하게 되어 교육청 학무과에는 초등계와 중등계가 장학 행정을 초·중등별로 분류되었다. 고등학교에는 군별로 협동 장학 위원장교가 생겨나서[최초 포천 실업 고등학교] 사무원을 교육청에 두고 고등학교 행정 업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1967년에는 「도서 벽지 진흥법」이 공포되어 삼정·대회산·중리·도평·산호·보장 금동 분교와 청산 중학교가 벽지로, 노곡 초등학교·관인 초등학교가 접적지로 지정되었다. 이에 따라 이들 학교는 좌천지가 아니라 상위 자격 취득의 점수 획득을 위해서 그리고 수당 지급 혜택으로 인해서 전보 희망자가 경합을 벌이기도 하였다.
1974학년도에는 신북 초등학교와 신평 분교가 미감아 수용 학교로 개교되어 처음으로 2학급 복식 수업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1990년 학생 감소로 신평 분교는 신북 초등학교로 흡수 통합되었다. 또한 1970년대 초 처음으로 주임 교사제가 실시되어 학교에는 일반 주임과 학년 주임을 임명하였다. 모든 학교는 학생으로 조직된 반공 소년대가 있었으며 이동 초등학교는 도 지정 연구 학교로 ‘반공 소년대 활동을 위한 반공 교육 내실화’ 연구를 하였다. 문교부 지정으로 포천 중학교가 1969년부터 1975년까지 ‘시청각 실험 학교’로 운영되었고, 송우 초등학교는 도 지정 연구 학교로 ‘시청각 매체 활용’에 대하여 연구를 수행하였다. 또한 이곡 초등학교가 1974~1975년 2년에 걸쳐 문교부 지정 자활 급식 학교 운영으로 묘목을 재배하고 토끼, 닭, 미꾸라지 등을 사육하며 급식 비용의 일부를 충당하였다.
교직원들은 새마을 운동의 주민 계도라 하여 교사가 1개 마을을 담당하여 봉사 활동, 향토 학교, 반공 소년대 활동을 지도하였고, 1972년 11월 유신 헌법의 찬·반 국민 투표가 있을 때에는 담당 마을의 학부모 계도 명목으로 출장하여 가가호호의 성분과 동향을 ·, ·, × 등으로 분석하여 교육청으로 1일 보고하는 정치 활동까지도 강요받았다. ‘국적 있는 교육’이 추진되어 교과서가 한글 일색으로 제작되었고, 학교마다 「국어 사랑 나라 사랑」의 표어가 나붙고 모든 공문이나 자료가 순 한글로만 작성되었다.
한편 경기도 포천시 영북면 운천리에 미군 부대가 주둔하면서 1960년대 말부터 인구가 증가하여 영북 초등학교 재학생이 4,000명 가까이 급증하여 운암 초등학교가 신설되었다. 하지만 1980년부터 미군이 철수하기 시작하면서 인구가 급감하여 운암 초등학교는 폐교되어 영북 초등학교에 통합되었다. 산호 분교·보광 분교·지현 분교·축성 분교·성남 분교가 초등학교로 승격하였고 성남 분교·신평 분교가 신설되었다. 포천 중학교와 포천 종합 고등학교가 분리되었고 내촌 중학교가 신설되었으며, 포천남 중학교가 동만 중학교로 개명되었고 재단 법인 성민 학원에서 동인 학원으로 바뀌었다.
[1980년대]
1980년대에는 교육 이념이 이전 유신 교육 이념과 달리 ‘조화롭고 창의적인 한국인 육성’으로 달라졌다. 경기 교육의 지표는 ‘전인적 인간 교육 강화’와 ‘사도의 실천’, ‘창의적이고 봉사적인 교실 중심의 지원 행정’에 두었다. 당시 교육 특징은 학원의 민주화가 꽃피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행정 우위의 하향식 권위주의가 점차 후퇴하면서 학원은 자율성이 허용되었고 학교 경영에서 교사의 참여와 의사가 반영되고 개인의 목소리도 점차 커졌다.
공문에 의한 지시 사항이 줄고 대통령 지시 사항, 국무총리 지시 사항 등 별도의 보고 문서 관리가 1987년 6공화국부터 감소되었고, 학교의 예산 집행에 있어서도 소규모의 학교인 경우 별도 취급되는 ‘전도 자금’ 지출 행위도 폐지되었다. 1980년대 말에는 각 급 학교에 컴퓨터와 워드 프로세서가 보급되면서 공문서나 교육 자료들이 컴퓨터와 복사기에 의존하면서 전산화되기 시작하였다. 학교마다 처음에는 8비트 컴퓨터가 보급되면서 컴퓨터 학생 교육이 시작되었고, 여건이 허락하는 학교마다 1교 1운동으로 지정 종목을 부여받아 지도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당시 가장 두드러진 교육 성과는 유아 교육이다. 1981년 3월 대부분의 학교가 병설 유치원을 설립하여 운영하였고 학교장이 원장을 겸직하게 되었다. 선단 초등학교·창수 초등학교·청성 초등학교·보장 초등학교·내촌 초등학교·영중 초등학교·화현 초등학교·영평 초등학교·가산 초등학교·금주 초등학교·정교 초등학교·운담 초등학교·축석 초등학교·도평 초등학교·이곡 초등학교·관인 초등학교·신북 초등학교·중리 초등학교·외북 초등학교에 병설 유치원이 신설되었다. 이와 달리 사립 유치원은 1957년 포천 유치원이 설립된 이후 복지 유치원[1980]·운천 유치원·영광 유치원[1981]이 들어섰다.
또한 1980년대 중반 전국 교직원 노동조합[전교조]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는 교육계의 문제를 넘어서 사회 문제로 비화되었으며 전국에서 1,100명의 관련 교사가 직위 해제, 파면 등으로 교육계를 떠나게 되고 경기도 포천에서도 2명의 교사가 교직을 떠나게 되었다. 그 후 전교조 문제는 학교 현장과 정치권에 변화를 주는 계기가 되었다. 학교 현장에는 전교조 가담 교사와 관리자 및 교련 가입 교사 간에 갈등이 야기되었고, 1991년 9월부터 교장 임기제가 실시되었다. 1980년대는 학교 연구 활동이 가장 왕성하였다. 당시 포천 교육청의 학습 지도 연구를 시작으로 도 지정 연구 학교가 활발히 운영되었다.
[1990년대]
1990년대 경기도 포천 지역 학교는 이농 현상으로 의무 교육 아동이 계속 감소되어 급당 인원은 줄었지만 학급 수는 오히려 증가하였다. 이로 인해 분교화 되거나 폐교되는 학교가 점차 늘어나게 되었다. 대회산·보광분교와 산호 초등학교가 영북 초등학교에, 사정 분교와 냉정 초등학교가 관인 초등학교에, 신평 분교는 신북 초등학교에, 금동 초등학교는 삼정 초등학교에, 판거 분교는 중리 초등학교에 각각 통폐합되었다. 폐교된 학교는 예절 분원, 녹색 체험 학습장, 청소년 수련장, 주민 복리 시설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1990년대 6차 교육 과정이 실시되었다. 초등학교의 경우 월말 평가 등의 각종 점수 위주의 공식 평가가 사라졌으며 평가는 있되 그 내용이 많이 바뀌었다. 객관식에서 주관식으로 관찰, 문답, 통신, 설문, 과정 평가를 통해서 전인 교육에의 접근을 시도하였다. 수, 우, 미, 양, 가 대신 기술식으로 통지표가 작성되고 따라서 우등생 제도도 기능 영역별로 모두에게 수여하는 방법을 채택하였다.
상설 클럽 활동이 학교마다 강조되어 컴퓨터, 영어 회화, 한문 등을 비롯하여 육상, 구기 등 1교 1운동의 체육 분야 특활과 합주, 합창, 무용 등 예능 분야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아동들의 소질 계발과 특기 신장에 힘쓰고, 장학 방침에 의한 내 고장 탐방 교육으로 관내 유적지 순회 교육에 임하고 유년대[BS], 유녀대[GS], 아람단 등의 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그러나 각종 학원 수강이나 과외를 통한 사교육 영역이 커졌다.
학부모의 참여로 체육 진흥회, 어머니회 등이 조직되었다. 당시만 해도 재정이 열악하여 여전히 겨울 난방에 장작을 땠다. 다만 유치원이나, 관리실 등에는 석유나 가스난로 사용이 보편화되었다. 여름에는 선풍기에 의존할 뿐 에어컨 사용은 재정 형편상 어려웠다. 각 급 학교는 점차 수세식 화장실로 탈바꿈해 갔다. 학교 과학 실험 기재는 초등학교의 경우 1995학년도에 학교별 보유량[경기도 기준]을 100% 확보하게 되었으며 컴퓨터[학생 교육용 및 사무용]와 복사기도 완비되어 학교 운영의 기본 정보가 입력되고 교직원 봉급도 컴퓨터로 처리하게 되었다. 각 학교는 교과 전담 교사제가 되어 있어 4학년 이상 6학년까지 4학급 이상 1명씩의 교과 전담 교사가 배치되어 있다.
경기도 포천지역 초등학교 28개교, 중학교 11개교, 고등학교 6개교 중 산호 초등학교가 폐교되었으며 삼정 초등학교만이 벽지[벽지 진흥법상 라 지구] 학교로 남게 되었다. 포천에 경성 전문 대학[2년제]과 대진 대학교[4년제]가 1992학년부터 설립 개교되어 포천은 교육 도시로서 발돋움하게 되었고 포천 출신 학생들의 교육 기회가 증대되었다.
[2000년대]
1997년 12월 고시된 제7차 교육 과정이 추진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국민 공통 기본 교육 과정과 고등학교 선택 중심 교육 과정으로 구성되는 것이 특징이며, 교육 내용과 방법을 진로와 적성에 맞게 다양화 하고 교육 내용의 양과 수준을 적정화하여 심도 있는 학습을 할 수 있도록 함을 방침으로 하여 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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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이후로 초등학교 학생 수가 계속 증가했지만, 1970년대 초를 분기점으로 점차 하향세를 보이게 되었다. 이는 농촌 인구의 감소[대도시 집중화]와 1960년대 인구 정책에 따른 결과였다. 2011년 현재 경기도 포천시의 초등학생 수는 1969년에 비해 63% 급감하여 1만여 명으로 줄었다.
2012년 10월 현재 대부분의 초등학교에 유치원이 병설되었다. 가산 초등학교·관인 초등학교·금주 초등학교·내촌 초등학교·도평 초등학교·보장 초등학교·선단 초등학교·송우 초등학교·신봉 초등학교·신북 초등학교·영북 초등학교·영중 초등학교·영평 초등학교·왕방 초등학교·외북 초등학교·운담 초등학교·유암 초등학교·이곡 초등학교·이동 초등학교·일동 초등학교·정교 초등학교·중리 초등학교·지현 초등학교·창수 초등학교·청성 초등학교·추산 초등학교·축석 초등학교·태봉 초등학교·노곡 초등학교·삼정 초등학교·포천 초등학교·화현 초등학교 병설 유치원 등이다. 사립 유치원은 늘푸른 유치원·동심 유치원·서일 유치원·세화 유치원·숲속 유정 유치원·아람 유치원·운천 유치원·자연 유치원·쟈니 유치원·소피아 유치원 등이 운영되고 있다.
초등학교는 32개교로 가산 초등학교·관인 초등학교·금주 초등학교·내촌 초등학교·도평 초등학교·보장 초등학교·선단 초등학교·송우 초등학교·신봉 초등학교·신북 초등학교·영북 초등학교·영중 초등학교·영평 초등학교·왕방 초등학교·외북 초등학교·운담 초등학교·유암 초등학교·이곡 초등학교·이동 초등학교·일동 초등학교·정교 초등학교·중리 초등학교·지현 초등학교·창수 초등학교·청성 초등학교·추산 초등학교·축석 초등학교·태봉 초등학교·노곡 초등학교·삼정 초등학교·포천 초등학교·화현 초등학교 등이다.
공립 중학교는 갈월 중학교·경북 중학교·관인 중학교·내촌 중학교·대경 중학교·삼성 중학교·송우 중학교·영북 중학교·영중 중학교·이동 중학교·일동 중학교·포천 여자 중학교·포천 중학교 등 12개교이고, 사립 중학교는 동남 중학교 1개교이다. 공립 고등학교는 관인 고등학교·송우 고등학교·영북 고등학교·일동 고등학교·포천 고등학교·포천일 고등학교 등 6개교이고, 사립 고등학교는 동남 고등학교 1개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