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05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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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六二五戰爭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양영조 |
[정의]
1950년부터 1953년까지 남한과 북한이 싸운 전쟁 당시의 경기도 포천 지역.
[개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은 주력 병력을 포천-서울 일대로 집중하여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북한군이 남침한 직후 주오 공격 대상이 된 경기도 포천 지역에는 국군 제7사단이 3·8선 경계 임무를 담당하고 있었고, 정면에는 제9연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사단 예비대는 없었다. 제7사단 방어 지역을 공격한 북한군은 제105전차 여단의 지원을 받는 2개의 정예 사단이었다. 그 중 제3사단이 포천 방향으로 공격해 왔다.
북한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사단장 유재흥 준장은 전방에 추진된 경계 부대로 하여금 적의 공격을 저지하도록 하고 주 방어 진지에 병력 투입을 서둘렀다. 그러나 당시 의정부에서 훈련 중이던 2개 연대 주력이 감악산으로부터 천주산을 연하는 주저항선에 투입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 동안에 전차를 앞세운 적이 도로를 따라 우회함으로써 주저항선 전방과 후방에서 혼전이 전개되었다. 북한군 제3사단은 25일 오전 중에 포천을 점령하고 시내에 진입하였다. 이렇게 개전 초일 경기도 포천 지역을 적에게 피탈 당함으로써 서울의 관문인 경기도 의정부가 위태롭게 되었다.
그런 상태에서 육군 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은 제7사단장 유재흥 준장과 제2사단장 이형근 준장에게 경기도 동두천과 포천 지역 공격을 명령하였다. 제7사단장은 성공 가능성이 희박해 보이는 상황이었지만 다음날인 26일 아침 역습을 감행하여 경기도 동두천 지역을 탈환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제2사단의 경기도 포천 지역 공격이 실패하자, 동두천에 진입한 부대의 퇴로가 차단되어 분산·철수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따라서 포천 지역은 북한군 치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 후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을 계기로 수도 서울을 다시 찾은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 북쪽으로 계속 진격하여 경기도 포천 지역을 탈환할 수 있게 되었다. 9월 28일, 아군 공격 부대들은 북한군을 서울 시내에서 쓸어내듯 소탕하며 경기도 포천 방면으로 계속 공격하여 북한군의 저항을 무력화시켰다. 유엔군의 인천 상륙 2주일 만에, 그리고 북한군에게 피탈당한지 3개월 만에 경기도 포천 지역이 완전히 수복된 것이었다.
한편, 중공군이 개입한 이후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12월에 3·8선 남쪽으로 철수하여 진지를 편성하고 있었다. 같은 해 12월 31일 중공군이 공격을 재개함에 따라 아군은 다시 경기도 포천 일대를 중공군에게 내어 주게 되었다. 그러나 다음 해 3월 아군은 재반격 작전을 통해 서울을 재탈환한데 이어 경기도 포천 지역도 재탈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