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05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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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開港期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도형 |
[정의]
개항 이후 1910년 국권 피탈 이전까지 경기도 포천 지역의 역사.
[개설]
경기도 북부에 위치한 포천 지역은 상대적으로 산간 지대가 주를 이루고 있다. 개항 이후 경기도 포천 지역은 서울·경기 지역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으며 근대화되어갔다. 주요 생산물은 느타리버섯 등이었으며, 수공업은 양주 윤씨 집성촌인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감암리 일대에서 싸리 공예품을 만들어 내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서구 문물의 유입과 산업화의 영향으로 점차 근대화되기 시작하였다.
1842~43년에 작성된 『경기지(京畿誌)』 「포천현조」를 살펴보면 포천의 호수는 2,668호, 인구수는 남자 6,503명과 여자 6,628명을 합해 모두 1만 3131명인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개항기를 통해 경기도 포천의 인구는 이를 상회해서 점차 증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구의 증가와 근대화의 과정 속에서 경기도 포천 지역은 점진적인 발전을 도모한 한편, 열강의 이권 침탈과 국망의 시련 속에서 항일 의식을 고취해 나갔다.
경기도 포천지역은 한말의 대표적인 유학자이자 의병장인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1833~1906]이 태어난 곳[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이다. 따라서 위정척사 운동의 영향을 받아 1907년 9월부터 독자적인 소규모 부대 중심의 의병 전투가 산발적으로 전개되었다. 1907년 9월 20일 100여 명의 의병이 경기도 포천에 출동하여 일진회원을 응징한 데 이어 9월 27일에는 50여 명의 의병이 일본 수비대와 교전하였고, 9월 30일에는 영평 분견소도 습격하였다.
경기도 포천지역에서 의병 부대들의 활동은 같은 해 10월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0월 4일에 경기도 포천 동쪽으로부터 20여 리[7.86㎞] 떨어진 현등사 부근에 집결한 50여 명의 의병이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을 벌인데 이어 소규모 전투를 계속하였다. 1907년 12월에 김연성(金演性) 부대가 중심이 되어 왕방산 일대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 공격한 것을 비롯해, 이듬해인 1908년 1월에는 경기도 포천군 산내면 출신으로 구 한국군 보병 하사였던 황재호가 이끄는 13명의 의병이 외소면 소재 상송 우시장을 기습 공격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