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11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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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益鉉 |
이칭/별칭 | 면암(勉菴), 찬겸(贊謙)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조준호 |
출생 시기/일시 | 1833년 - 최익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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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841년 - 최익현 김기현 문하에 들어감 |
수학 시기/일시 | 1843년 - 최익현 이항로 문하로 들어감 |
활동 시기/일시 | 1846년 - 최익현에게 이항로가 면암 아호 내림 |
몰년 시기/일시 | 1906년 11월 17일 - 최익현 사망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09년 11월 04일 - 최익현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 봉수산에 안장 |
출생지 | 최익현 출생지 -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 |
묘소|단소 | 최익현 묘소 -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 산21-1 |
사당|배향지 | 채산사 -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 |
사당|배향지 | 모덕사 - 충청남도 청양군 |
사당|배향지 | 무성 서원 -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
성격 | 문신|학자|의병장 |
성별 | 남 |
본관 | 경주(慶州) |
대표 관직|경력 | 호조참판 |
[정의]
조선 후기와 개항기 포천 출신의 문신이자 학자, 항일 의병장.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勉庵). 아버지 최대(崔岱)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경주 이씨(慶州李氏)이며, 부인은 청주 한씨(淸州韓氏)이다.
[활동 사항]
최익현(崔益鉉)[1833~1906]은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에서 출생하였다. 9세 때인 1841년 김기현(金琦鉉)의 문하에서 유학의 기초를 공부했으며, 11세 때인 1843년 경기도 양근[양평]으로 이주하여 14세 때부터 당시 대유학자인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최익현은 이때 성리학의 기본을 익혔으며, 애국과 호국 정신을 배워 훗날 ‘위정척사’ 사상의 근간을 마련하였다. 특히 이항로는 최익현이 15세 되던 해 그의 인품을 격려하기 위해 ‘면암(勉庵)’이라는 글을 써서 주었는데, 이것이 아호(雅號)가 되었다.
최익현은 20세 때 청주 한씨를 부인으로 맞았고, 22세 때에는 다시 고향인 가채리로 돌아와 과거 준비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23세 때인 1855년 3월 별시 문과에 병과(丙科) 11등으로 급제하여 승무원 부정자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순강원 수봉관(順康園守奉官)·사헌부 지평·사간원 정언·신창 현감·성균관 직강·사헌부 장령·돈녕부 도정 승정원 동부승지 등의 청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불의와 부정을 척결하는 강직성을 보여 주었다. 특히 순강원 수봉관으로 재직할 때, 나라 의식을 관장하는 예조판서가 금지 구역에 묘 쓰는 것을 도와주자 직접 그를 찾아가 “어찌 나라 녹을 받는 대신께서 국법을 어기시려 합니까?”라고 호통 친 일화는 유명하다.
1868년(고종 5) 9월에 올린 시폐(時弊) 상소는 당시 최고 권력가이자 임금의 아버지인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을 비판하고 시정을 건의한 것이다. 최익현은 이 상소에서 경복궁 복원 공사를 중단하고, 수탈 행정을 금지하며, 당백전과 사대문 문세의 징수를 혁파할 것을 촉구하였다. 최익현은 당시 사헌부 장령이란 감찰 기구의 직책을 맡고 있었지만, 흥선 대원군의 기세 앞에서 바른말을 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 상소로 인해 최익현의 명성은 전국에 퍼지게 되었고, 임금의 신임을 얻어 국왕의 비서인 승정원 동부승지와 재정 부서인 호조참판 등을 역임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흥선 대원군이 선비들의 근원인 서원을 철폐하는 등 폭정을 계속하자, 이른바 ‘계유 상소(癸酉上疏)’를 올리며 당시 집권층의 부패와 흥선 대원군의 실정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이 상소로 흥선 대원군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으나, 최익현 또한 부자간을 이간시켰다는 이유로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1876년(고종 13) 일본이 통상을 요구하며 조선과 수호 조약[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최익현은 그 길로 도성으로 올라가, 궐문 앞에 도끼를 들고 엎드려 조약의 불가함을 외쳤다. 이것이 유명한 ‘지부복궐척화의소(持斧伏闕斥和義疏)’인 ‘오불가척화소(五不可斥和疏)’이다. 그 내용을 보면 1. 일본의 침략에 의한 정치적 자주 위기, 2. 일본의 사치품에 의한 조선의 전통 산업 파괴, 3. 일본은 서양의 적과 같으며 천주교가 확산되어 전통 예의의 위기 조장[왜양일체론], 4. 일본인에 의한 재산과 부녀자 약탈의 위기, 5. 금수[짐승]와 같은 일본과 문화 민족인 우리가 교류할 때에 도래할 문화의 위기 등이다.
이는 300여 년 전 임진왜란으로 우리 국토가 유린당했던 과거를 통해 일본인들의 잔악한 품성을 익히 알고 있음을 알리고, 통상 조약 체결 후 우리에게 닥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위기를 통찰한 주장이다. 또한 일본보다 우월한 우리의 문화 의식을 표현한 결과라고 할 것이다. 최익현의 ‘왜양일체론’은 단순히 일본과 서양을 동일하게 간주하는 배타적 척사론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와 문화적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주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 상소로 인해 최익현은 다시 흑산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고, 유배에서 풀려난 이후 약 20여 년간 고향인 가채리에 머물면서 칩거하였다. 이 시기는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운동’ 등 일본과의 분란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던 때로, 최익현의 침묵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최익현은 이 시기 향후 위정척사 사상을 바탕으로 한 항일 운동의 전개 방향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이는 투쟁의 방식이 변화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이전까지는 상소라는 언론 수단을 통해 개인적인 방법을 추구했다면, 칩거 이후에는 집단적·무력적인 항일 의병 투쟁 형태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상소라는 수단을 통해서는 우리에게 닥친 국난을 극복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물론 1895(고종 32) 국모를 시해한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청토역복의제소(請討逆復衣制疏)」를 올리며 친일 개화파정권을 적으로 규정하고 개화 정책의 전반적 폐지를 요구하는 등 정치의 폐단과 일본을 배격하는 상소도 끊임없이 올렸다.
최익현은 1905년(광무 9)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곧바로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疏)」를 올려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하고, 망국 조약에 참여한 박제순(朴齊純)·이완용(李完用) 등 5적의 처단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74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항일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전라도로 내려갔다. 1906(광무 10) 윤4월, 최익현은 전라북도 태인[현 정읍시]에서 궐기하며 「창의소(倡義疏)」를 올리고, 「포고 팔도 사민(布告八道士民)」이란 제목의 포고문을 돌리면서 민중의 봉기를 촉구하고 항일 의병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러나 그의 항일 의병 운동은 일본 헌병대에 의해 저지당했으며, 결국 체포되어 대마도로 압송되었다.
대마도로 떠나기 전 부산 초량 앞바다에 도착한 최익현은 버선에 모래를 채웠다. 그는 이렇게라도 해서 왜적의 땅을 밟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듯 최익현은 일본 유배 생활에서도 그들이 주는 물과 음식을 일체 거절하며 굳은 의지로 마지막까지 민족을 위해 항거하다 끝내 타향인 대마도에서 순국하였다.
최익현의 죽음은 우리 국토뿐만 아니라 대마도 주민들도 슬픔에 잠기게 하였다. 민족의 자주권 회복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다 순국한 그의 유지는 대마 도민들에게도 귀감이 되어, 시신을 운구하기 위해 대마도를 떠날 때 원주민 대부분이 나와 전송했을 정도였다. 애도의 행렬은 시신이 부산에 도착하면서 더해졌다. 부산항 모든 시장이 문을 닫고 애도했으며, 가는 길마다 노제를 지내며 그의 넋을 위로하였다. 당시 최익현의 시신이 당도한 데마다 선비들이 모여들자 일본 총독부에서는 충청남도 논산에 가매장한 후 선비들을 강제로 해산시켰다. 결국 최익현의 시신은 그로부터 2년 후에나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에 안장될 수 있었다.
[학문과 저술]
최익현의 우국 애민 정신과 위정척사 사상은 한말의 항일 의병 운동과 일제 강점기 민족 운동·독립운동의 지도 이념으로 계승되었다. 그러나 위정척사 운동에 비해 학문적인 면에서는 큰 업적을 남기지 못하였다. 최익현은 성리학에 기본을 둔 이항로의 학문을 이어받았으나 이기론(理氣論)과 같은 형이상학보다는 애국의 실천 도덕과 전통 질서를 수호하는 명분론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이기론은 이항로의 심전설(心專說)을 계승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의 사상과 이념은 역사적 현실에 바탕을 둔 실천성을 지녔기 때문에 구국 애국 사상으로, 민족주의 사상으로 승화, 발전할 수 있었다. 여기에 위정척사 사상의 역사적 역할과 의의가 있다.
최익현은 김기현·이항로를 스승으로 성리학을 배웠으나 후자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학우 관계는 이항로 문하에서 수학한 동문인 이준(李埈)·이박(李墣)·임규직(任圭直)·김평묵(金平默)·박경수(朴慶壽)·유중교(柳重敎) 등으로 비교적 단순한 편이었다. 그러나 고향인 포천 출신인 김평묵과 유기일(柳基一)과는 인척 관계를 형성하고 꾸준한 교우 관계를 형성하였다. 저서로 『면암집(勉庵集)』 40권, 속집 4권, 부록 4권이 있다.
[묘소]
묘는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 산21-1번지에 있는데, 충청남도 기념물 제29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상훈과 추모]
최익현이 순국하자 그의 우국충정을 기리기 위해 전국 곳곳에서 유림들이 사당을 건립했는데, 충청남도 청양군 ‘모덕사’를 비롯해 항일 의병이 봉기했던 전라북도 정읍시의 ‘무성 서원’ 등 전국적으로 약 20여 곳이나 되었다. 최익현의 고향인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에서도 후손과 지역 유림이 뜻을 모아 채산사(茝山祠)를 건립하였다. 채산사는 1920년 최익현의 영혼까지 두려워한 일본인들에 의해 철거되었으나 1935년 재건됐으며, 이후 훼철과 재건을 반복하다 1949년 해방 이후 복원되어 최익현의 위패와 영정을 봉안하였다. 건국 이후인 1962년 건국 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