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11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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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基一 |
이칭/별칭 | 성존(聖存)/용계(龍溪)/용서(龍西)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고모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전병무 |
출생 시기/일시 | 1845년 - 유기일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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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76년 - 유기일 화서학파 48명과 함께 위정척사 운동 전개 |
몰년 시기/일시 | 1904년 - 유기일 사망 |
출생지 | 유기일 출생지 - 경기도 포천시 소흘면 고모리 |
묘소|단소 | 유기일 묘소 -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계류리 |
사당|배향지 | 산앙단 -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금현 3리 |
성격 | 문인|학자 |
성별 | 남 |
본관 | 문화(文化) |
[정의]
조선 후기와 개항기 포천 출신의 문인이자 학자.
[가계]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성존(聖存), 호는 용계(龍溪)·용서(龍西). 아버지는 동지 돈녕 부사 문녕군(文寧君) 유병철(柳秉喆)이다.
[활동 사항]
유기일(柳基一)[1845~1904]은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 소흘면 고모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했을 뿐만 아니라 문재(文才)도 뛰어났다. 어른들이 모란[牧丹]을 들고 글을 지으라고 하자 즉석에서 “목단화다발(牧丹花多發)하니 부귀우번화(富貴又繁華)”라고 지었다.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76년(고종 13) 홍재구(洪在龜), 유인석(柳麟錫), 윤정구(尹貞求) 등 화서 학파(華西學派) 48명과 함께 개항에 반대하는 「경기강원양도유생논양왜정적잉청절화소(京畿江原兩道儒生論洋倭情迹仍請絶和疏)」를 올리는 등 위정척사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유기일은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일생을 성리학을 연구하였고, 일제 침략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고향 향적산(香積山) 아래에 은거하며 『척양록(斥洋錄)』 등의 저술 활동과 후배 양성에 힘썼다. 아버지가 죽자 나이가 많음에도 3년 동안 시묘를 살며 예를 다하였다. 몸이 쇠약해져 1904년 59세의 나이로 죽었다.
[학문과 저술]
유기일은 포천 지역의 거유(巨儒)로서 많은 문집을 남겼다. 수제자 나상협(羅相協)이 그의 글을 모아 『용서고(龍西稿)』 114권을 필사 정리하여 보존하였으나, 6·25 전쟁 때 폭격으로 대부분 소실되고 25권만 남았다.
[묘소]
묘는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계류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김권(金權), 김평묵과 함께 그를 배향한 산앙단(山仰壇)이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금현 3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