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1219 |
---|---|
한자 | 李海朝 |
이칭/별칭 | 호: 열재(悅齋), 이열재(怡悅齋), 동농(東濃) 필명: 우산거사(牛山居士), 선음자(善飮子), 하관생(遐觀生), 석춘자(惜春子), 신안생(神眼生), 해관자(解觀子)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이계형 |
몰년 시기/일시 | 1927년 05월 11일 - 이해조 사망 |
---|---|
출생 시기/일시 | 1869년 2월 27일 - 이해조 출생 |
출생지 | 이해조 출생지 -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신평리 121 |
묘소 | 이해조 묘소 -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신평리 |
성격 | 소설가 |
성별 | 남 |
본관 | 전주 |
[정의]
일제 강점기 경기도 포천 출신의 소설가.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동농(東濃)·이열재(怡悅齋), 필명은 우산거사(牛山居士)·선음자(善飮子)·하관생(遐觀生)·석춘자(惜春子)·신안생(神眼生)·해관자(解觀子). 인조의 셋째 아들인 인평 대군의 10세손으로, 아버지는 이철용(李哲鎔)이고, 어머니는 청풍 김씨이다.
[활동 사항]
이해조(李海朝)[1869~1927]는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신평리 121번지에서 1869년 2월 27일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서울로 이주하여 신소설 작가로 활동하였다. 할아버지 이재만(李載晩)이 흥선 대원군의 측근으로 활약하여 포천시 신북면 신평리 일대를 하사 받은 뒤로 포천이 세거지가 되었다. 이해조는 어려서 한문 공부를 하여 19세에 초시에 합격하였으며, 25세~26세 무렵에는 대동사문회(大東斯文會)[한시를 즐기던 유학자들의 모임]를 주관하였다. 활쏘기와 거문고 타기가 취미였으며, 특히 국악에 조예가 깊었다. 이후로 아버지가 교감으로 있던 일성 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웠으며, 1905년 기독교에 입교하여 신자가 되었다.
1906년 2월에는 부친이 설립한 신야 의숙(莘野義塾)에서 근무하기도 하였다. 이때 이해조는 향교에 소속된 토지를 학교 운영비로 충당하고자 하였으나 유림들의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서울의 국민 교육회 내 사무소를 빌려 자신의 활동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모아 찬성회를 열었다. 찬성회에는 윤치호(尹致昊)·장지연(張志淵)·양재건·지석영(池錫永) 등 30여 명의 당대의 개화 지식인들이 참여하였다. 그 결과 정부에서 이해조의 청원을 받아들여 향교의 전답을 신야 의숙의 경비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이 무렵, 이해조는 한학자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한문 소설 「잠상태(岑上苔)」로 남겼다. 「잠상태」는 그의 첫 작품으로 1906년 11월부터 1907년 4월까지 『소년 한반도(少年韓半嶋)』에 연재된 미완의 작품이다. 1907년 대한 협회와 1908년 기호 흥학회 등의 계몽 단체에 가담하여 신학문 소개와 계몽 활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이때에 일본어를 독학하여 『철세계(鐵世界)』[1908], 『화성돈전(華盛頓傳)』[1908], 『앵속화 제조법』 등을 번역하였다. 『제국신문』·『황성신문』·『매일신보』 등에서 기자로 근무하면서 30여 편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1908년에 대한 협회 교육부 사무장, 실업부 평의원, 기호 흥학회 평의원, 『기호 흥학회 월보』편집인으로 활약하는 한편, 양기탁(梁起鐸)·주시경(周時經)·이준(李儁)·노익형(盧益亨) 등과 함께 광무사를 조직하여 국채 보상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59세가 되던 1927년 5월 11일에 포천에서 병사하였다.
이해조의 작품은 초기에는 정치 소설적 형태를 보였지만 후기로 올수록 점차 대중적인 흥미를 강조하는 쪽으로 변하였다. 특히 당대의 풍속에 대한 폭넓은 관심을 보여주었다. 이해조의 문학적 업적은 소설과 번역, 근대적인 문학관 등을 통해 조명해 볼 수 있다. 먼저 창작 소설을 볼 때, 『자유종(自由鐘)』[1910]은 봉건 제도를 비판하는 정치적 개혁 의식이 뚜렷하였다. 특히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 신교육의 고취, 사회 풍속의 개량 등 개화 의식이 분명하였다. 형식면에서는 토론 소설의 특징을 꼽을 수 있다.
가장 비극적인 주제를 보여 주는 『춘외춘(春外春)』[1912]·『구의산(九疑山)』[1912], 미신 타파를 주장한 『구마검(驅魔劍)』[1908], 남녀의 애정 문제를 다룬 『화세계(花世界)』[1911]·『원앙도(鴛鴦圖)』[1911]·『봉선화(鳳仙花)』(1913) 등의 신소설들이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해조는 이인직(李人稙)과 최찬식(崔瓚植)의 중간적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해조가 택한 이와 같은 창작 태도는 논자에 따라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화의 혈」 등에 나타난 소설에 대한 그의 견해는 문학사적 의미에서 주목할 만하다.
[저술 및 작품]
주요 작품으로는 「잠상태」[1906], 「빈상설(鬢上雪)」[1907], 「홍도화(紅桃花)」·「구마검」[1908], 「원앙도」[1909], 「자유종」·「만월대」[1910], 「쌍옥적」·「화세계」·「월하가인」·「모란병(牡丹屛)」[1911], 「소양정」·「춘외춘」·「탄금대(彈琴臺)」·「화의 혈(花의血)」·「구의산」·「옥중화(獄中花)」·「강상련」[1912], 「연의 각(燕의脚)」[1913], 「정선 조선 가곡」[1914], 「토의 간(兎의肝)」[1916], 「홍장군전」[1918], 「강명화실기」[1925] 등이 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신평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