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0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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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改新敎 |
이칭/별칭 | 기독교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진구 |
[정의]
경기도 성남시에서 있는 로마 가톨릭 교회 및 동방정교회와 함께 기독교의 3대 전통에 속하는 기독교의 분파.
[성립]
개신교는 16세기 초 로마 가톨릭 교회 내부에서 교회 개혁을 주장하는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종교 개혁으로 알려진 이 운동의 주창자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고발하면서 교회의 전통과 권위에 반항하였기 때문에 프로테스탄트(protestants)라는 별명을 얻었다. 종교 개혁 운동은 독일 지역에서 먼저 등장하였지만 점차 스위스,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스칸디나비아반도 등 전 유럽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종교 개혁 운동의 확산은 마침내 신교와 구교 세력의 정면 충돌을 가져왔으며 이는 30년 전쟁과 위그노전쟁으로 표출되었다. 그러나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으로 신앙의 자유가 보장됨으로써 개신교와 가톨릭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었다.
[내용]
개신교 진영은 교황 제도, 미사, 연옥설(煉獄說), 화체설(化體說), 그리고 성인(聖人) 공경 등과 같은 가톨릭의 전통적 교리와 제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한 교리와 제도들은 성서적 근거를 갖고 있지 못하며 교회의 인위적 발명품에 불과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오직 『성서』로 돌아갈 것을 외쳤다. 구원론 논쟁에서도 은총과 믿음을 강조하였다. “오직 은총만으로(sola gratia)! 오직 믿음만으로(sola fide)! 오직 『성서』만으로(sola scriptura)!”라는 당시의 표어는 이러한 개신교 신앙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개신교가 내세운 또 하나의 강력한 무기는 ‘양심의 자유’이다. 각 개인은 어떠한 외적 권위에 의해서도 신앙상의 문제에 대해 간섭받지 않을 수 있는 양심의 자유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누구나 자신의 양심에 따라 신앙적 선택과 행위를 할 수 있으며 자발적인 신앙 공동체를 결성할 수 있다. 그 결과 개신교는 처음부터 수많은 교파로 출발하게 되어, 루터교, 개혁교회, 장로교, 성공회(聖公會), 침례교, 감리교, 성결교, 안식교(安息敎), 구세군(救世軍), 퀘이커(Quaker)와 같은 주요 교파를 비롯하여 수백 개 교파가 존재하고 있다.
개신교가 한국 사회에 처음 들어온 것은 19세기 후반이다. 특히 1882년 한미통상조약 이후 미국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부를 필두로 하여 캐나다, 호주, 영국 등에서 수많은 선교사들이 파송되었다. 선교 활동이 본격화되면서 선교부 사이에 경쟁과 중복 선교가 문제로 부각되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교지 분할 협정이 선교부들 사이에 체결되었다. 그 결과 각 지역은 특정 교파가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대도시의 경우에는 여러 교파가 동시에 선교할 수 있었지만, 그밖의 지역에서는 특정 선교부만이 진출하도록 협정이 체결되었다. 당시 성남 지역은 북장로교 선교부의 선교 구역으로 할당되었고, 그 결과 오늘날 이 지역에서는 장로교가 뚜렷한 강세를 보이게 되었던 것이다.
[변천]
성남 지역의 개신교 역사는 크게 3시기로 나누어진다. 제1기는 개신교의 전래에서 1968년 광주대단지 개발 이전까지이고, 제2기는 성남시 개발 시점부터 1989년 분당 신도시 개발 이전까지이고, 제3기는 분당 신도시 개발 이후이다.
전래 초기에는 서울에서 파견되는 목사 한 사람이 성남 지역에 퍼져 있던 여러 개 작은 교회를 순회하며 돌보는 것이 관행이었다. 해방 이전까지 광주군 지역에는 5, 6개의 교회밖에 없었는데 그 가운데 2개의 교회가 지금의 성남시에 있었다.
1968년 광주대단지 사업이 시작될 무렵에는 성남 지역의 교회수가 12개로 늘어났다. 이곳에 주택 단지 조성 사업이 시작되자 갑자기 많은 교회가 생겨난 것이다. 1970년에는 20개 교회를 넘었는데, 시청 공보실에 등록을 하지 않은 소규모의 교회까지 합하면 그 숫자는 더 많았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초기부터 급격히 많은 교회가 설립된 것은 이 지역이 국내 최초의 인공 도시이며 철거민들이 강제로 실려 와서 주민 구성을 이룩한 특수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성남 지역 구성원의 대다수는 공장노동자, 노점상, 막노동자, 파출부, 그리고 가내 수공업 종사자 등과 같은 바닥 계층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최저 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 조건에 시달렸다. 따라서 이 지역의 교회는 순수한 선교적 관심만이 아니라 주민들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 관심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성남 지역의 빈민층을 위한 사회 선교와 사회 활동을 가장 체계적으로 한 교회는 주민교회(住民敎會)이다. 주민교회의 이러한 사회 선교와 맥을 같이 하여 1980년대에는 성남 YMCA와 YWCA와 같은 기독교 청년 운동 단체가 설립되었다.
1989년에 시작된 분당 신도시 개발은 성남시의 성격을 또 한 번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분당 개발로 인해 성남시의 외곽에 자리한 낙후된 농촌 지역이 쾌적한 신도시로 탈바꿈하여 이 지역은 인구가 급증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장 대표적인 중산층 거주 지역으로 급부상하였다. 이러한 사회 경제적 변화는 종교 지형에도 중대한 변동을 초래하였다. 개발 이전의 분당 지역에는 교회가 거의 없었으나 신도시 개발 10여년 만에 150개 이상의 교회가 새로 생겨났다. 교회의 성격 자체도 기존의 농촌 교회들과는 매우 달라졌다. 교회의 설교나 예배가 주로 중산층의 종교적 욕구와 취향을 반영하는 중산층 교회로 탄생한 것이다. 상대적으로 서민층이 두텁게 존재하는 수정구와 중원구의 교회들과는 상당히 다른 독특한 교회 분위기를 보이고 있다. 이처럼 분당 지역에서 교회와 교인수가 급증함에 따라 성남시 전체의 교인수와 교회수도 증대하게 되었다.
성남시의 교인 수는 2007년 현재 전체의 25.2%이며 남자(22.7%)보다는 여자(27.6%)가 많고 다른 종교에 비해 대졸이상(30.6%)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은 편이다. 교회의 총수는 600개 이상이며 그 중에 장로교가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의의]
개신교는 광주대단지 조성 사업으로 인해 일어난 성남 지역의 사회 경제적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성남 주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분당 신도시 개발과 함께 등장한 중산층 문화와도 적극적인 관련을 맺으면서 종교적 역할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