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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당장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100925
한자 盆唐場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지명/시설
지역 경기도 성남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강병수

[정의]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에 분당리에 개설되었던 향시(鄕市)의 하나.

[개설]

15세기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지방의 향시는 16세기에 보편화되어 전국적으로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가 강점하면서 행정구역 변경과 함께 시장의 개설과 역할도 달라지게 되었다. 조선시대는 대부분 면 단위로 시장이 개설되었으나 이때에 이르면 이(里) 단위로도 시장이 개설되게 된다. 1917년에 형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판교장분당장은 각각 낙생면 판교리돌마면 분당리에 개설된 것이다.

[내용]

18세기 중기에 전국의 장시는 1,000여 개소를 넘을 정도로 발달해 있었다. 이는 대개 5일장이었으며, 하루 왕래가 가능한 30리~40리(약 4㎞)의 거리를 표준으로 시장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19세기 중기만 하여도 성남지역의 장시로는 남한산성 내의 성내장(城內場)과 낙생장이 개시되었다. 성내장은 매달 2일과 7일에, 낙생장은 3일과 8일에 열리는 5일장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장시는 일제강점기가 되는 20세기 초반에는 조선 사회의 변화와 함께 일제의 행정구역 변경이 함께 작용하여 시장권도 다시 조정된 것으로 보여진다. 현 성남시내만을 보면 성내시장은 다른 시장권으로 흡수되고 낙생장판교장으로 그 이름이 바뀐다. 이는 지역을 바꾸었다기보다는 낙생장판교장으로 이름을 변경한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 행정지명도 낙생면 판교리로 판교 자체가 낙생면에 속해 있었던 것이다.

분당리는 처음 소속이 명확하지 않으나 돌마면 분당리로 추정된다. 그리고 분당장낙생장을 잇는 판교장과 함께 1917년에 개설되었으나 광주군의 경안장과 용인 부근의 장, 그리고 판교장에 시장권이 차츰 흡수됨으로써 그 시장성을 잃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분당장이 사라진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951년에 돌마우체국분당리 장터에 세웠다는 기록으로 보아 1951년 이전에 폐쇄된 것은 확실하다.

[의의]

기록에 의하면 성남지역에도 18세기 중기부터는 지방의 향토시장이 열렸다. 그러나 분당장은 전통적인 조선시대의 장터는 아니었던 것 같다. 일제강점기인 1917년에 개설된 것으로 보아 행정구역 변천에 따라 조정국면에서 탄생된 시장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성남시 분당구에 20세기 초반 전통적이지는 않지만 한 세대 동안 시장이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분당신도시의 탄생과 함께 그 의미를 되새겨봄 직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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