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24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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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八十年代勞動運動 |
분야 |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상훈 |
성격 | 노동 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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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연도/일시 | 1980년대 |
발생(시작)장소 | 경기도 성남시 |
관련인물/단체 | 민주노동조합총연합성남광주하남지구협의회|한국노동조합총연합 성남광주지부 |
[정의]
경기도 성남시 지역에서 1980년대에 진행된 노동 운동.
[개설]
1980년대는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매우 격동적인 시기였다. 신군부 세력의 군사 정변에 맞선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무력 진압, 그리고 이어지는 군사 독재의 폭압에 맞선 1987년 6월 항쟁과 직선제 쟁취, 저임금과 열악한 근로 조건에 맞선 노동자들의 대투쟁으로 이어지면서 민주화의 토대를 마련한 시기이다. 이 시기 성남에서도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설립 운동을 비롯한 노동 운동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된다.
또 이 1980년대의 노동 운동을 자양분으로 해서 1993년 성남광주이천지역 노조대표자회의를 출범시키는 등 성남 지역의 활성화된 노동조합 조직 및 활동을 경기도 주변 지역으로 확산시키게 되며, 1997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경기도지부 성남광주하남지구협의회를 건설하는 토대가 되었다.
[1970년대 이전]
1971년 광주대단지 항쟁을 겪었던 정부는 성남 이주 철거민 고용을 위해 성남공단 조성에 나섰다. 1974년에 제1공단·2공단이 준공되었으며, 1975년 9월 성남공업단지협회가 발족되고, 1976년에 제3공단이 준공되었다. 공단이 조성되자 기업체들이 입주하게 되고 미약하나마 노동조합들이 생겨났다.
이를 바탕으로 1978년 2월 26일에는 샤니노동조합 위원장 이기권을 초대 의장으로 하는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성남지구협의회가 결성되었으며, 이듬해인 1979년 3월 16일에는 제1차 정기총회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정부의 억압과 조직 환경의 미비로 제대로 활동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1980~1987년 시기]
1980년 봄 민주화의 열기 속에 성남에서는 진선미 가구에서 파업이 있었으나 그 효과는 미미하였다. 1980년 5월의 광주 시민 학살에 항의하여 노동자 김종태가 6월 9일 분신하였다.
1984년 3월 28일 에스콰이어, 8월 라이프, 12월 협진화섬에 노동조합이 결성되고 1985년에 광명전기·광성화학·상일가구 등에서 노동조합이 결성되어 근로 조건 개선을 위한 투쟁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회사측의 어용 노동조합 설립과 노동조합 탈퇴 강요와 회유 또는 해고에 맞선 투쟁이 이어졌다.
이 시기 노동 운동은 이전의 소그룹적 활동에서 벗어나 대중적인 노동조합과 노동 운동으로 전환되는 시기라 할 수 있는데, 그 배경에는 한울야학과 만남의집 출신 노동자의 성장과 학생운동권 출신 노동자들의 결합이 작용하고 있었다.
1984년 6월 29일 AFCOA KOREA 노동자들의 해고와 1985년 7월 5일 협진화섬의 노동자 해고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현장 투쟁 경험이 있는 노동자들이 배출되었고, 이들이 향후 성남노동자의집·애국노동자연합·성남일터 등 노동 운동 조직을 키워내는 원동력으로 이어진다.
1988년 8월 8일 성남공단 입구에서 연대 시위 집회가 있었는데, 이 8·8 공단 시위는 성남 지역 전체의 연대를 이끌어 낸 최초의 집회였다는 점에서 성남 지역 노동 운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시위 이후 성남 지역내의 노동조합 연대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1985년 9월에는 노동 운동권 일부에서 학생 출신 노동 운동가를 중심으로 최초의 노동자 투쟁 단체인 성남노동자생존권확보투쟁위원회가 결성된다. 이어 임금인상투쟁위원회와 보임그룹이 이 조직과 합류하여 성남노동자투쟁위원회라는 연대 조직이 결성되었고 이들이 각종 노동자 투쟁을 주도하였다.
종교인과 지식인들도 성남민주사회발전연구회를 발족하여 노동 운동 전반에 걸쳐 본격적으로 지원에 나섰다. 상대원 분도수녀원 소속 만남의집에서는 교육과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주민교회 산업선교부 노동분과도 교육과 지원을 활발히 펼쳤다.
학생들 역시 노동야학을 통해 활발한 교육 활동을 펼쳤다. 1986년에는 현장 바깥에서의 활동으로 이어져 4월 2일 박영진 동지 추모식, 10월 아시안게임저지시위 등에 학생 운동과 합세하기도 했다.
그러나 성남노동자투쟁위원회는 노선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얼마 못 가 와해되기에 이른다. 일상 투쟁을 강조했던 성남노동자생존권확보투쟁위원회와 대중성과 현장 소모임을 통한 장기적인 준비를 강조했던 임금인상투쟁위원회가 결합점을 찾아내지 못한 것이다. 그 후 성남노동자생존권확보투쟁위원회는 성남노동자투쟁연합으로 개편되었고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두 그룹간의 논쟁은 더욱 가열되었다.
1987년 초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이 발생하자 전두환 군사 독재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된다. 성남 지역 노동조합을 비롯한 노동 운동 진영도 6월 항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6·29 선언으로 민주화 항쟁이 승리한 직후인 1987년 7월 3일 우리나라 최대의 중공업 도시 울산에서 현대엔진노동조합이 결성된다. 당시 노동조합 결성에 관한 한 난공불락의 철옹성으로 불리던 현대그룹에 노조가 결성되었다는 점에서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현대엔진노동조합의 결성은 울산 전역을 노동자 투쟁으로 휩싸이게 하였다.
이러한 불길은 부산·거제·마산·창원으로 번져 갔고 이윽고 서울, 인천·부천·구로·안양·군포·성남 등 수도권으로 확산되면서 소위 1987년 7·8·9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나게 된다. 성남 지역 노동 운동 진영은 이러한 1987년 6월 항쟁과 7·8·9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면서 생존권 보장과 민주적인 노동조합 설립을 위한 노동 운동이 더욱 가속화된다.
[1987년 이후 시기]
1987년 이전까지는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성남지부 소속 노동조합이 있기는 하였지만 회사측의 입장을 대변하는 어용 노동조합이 더 많았다. 1987년 6월 항쟁과 7·8·9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면서 노동 운동을 지원하는 만남의집·성남노동자의집·성남일터·애국노동자연합 등 노동 운동 단체의 활동이 더욱 활성화되면서 노동조합이 급속도로 늘어났다.
노사간 갈등도 첨예해져 사용자들은 구사대를 동원하고 해고를 남발하였으며 노동자들은 사업장 점거와 농성으로 맞섰다. 게다가 노동자들 간의 대립도 커져 성남 노동 운동 역사상 가장 극렬한 갈등 양상을 보인다.
이 과정에서 1988년 4월 25일 고려피혁주식회사의 노동조합 위원장 최윤범이, 1989년 덕진양행 노동조합 위원장 김윤기가 분신하는 것을 계기로 결속력을 되찾아 1989년 5월 1일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성남지부와 성남노동조합협의회가 성남지구노동조합총연합으로 결합되어 단일 지역 노동조합 연합 단체를 건설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