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24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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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六月抗爭 |
이칭/별칭 | 6·10민중항쟁 |
분야 |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락중 |
성격 | 민주화 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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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연도/일시 | 1987년 6월 10일 |
종결연도/일시 | 1987년 6월 29일 |
관련인물/단체 | 이해학|김태년|정형주|주민교회|경원대학교 |
[정의]
경기도 성남시에서 1987년 6월에 발생했던 반독재 민주화 운동.
[역사적 배경]
12·12 사태로 집권한 제5공화국 전두환 군부독재정권이 장기 집권을 위해 재야와 야당 인사를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이에 맞서 재야 인사를 비롯한 학생·노동자 등 국민들은 직선제 개헌 주장을 키워갔고, 1986년 5월 3일 수만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가 인천에서 일어났다.
군부 정권은 이러한 재야와 야당의 직선제 개헌 목소리를 무마하고 민족민주운동 진영을 탄압하기 위해 1986년 10월 28일 건국대학교에서 벌어진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 집회를 좌익 혁명 분자들의 난동 사건으로 조작하고 전원 연행하여 1,350명을 구속하는 등 탄압의 강도를 높였다. 이러한 탄압에 맞서 민주화를 갈망하는 국민들의 저항도 커갔다.
당시 성남지역 대학생으로 구성된 성남시대학생연합회 소속 학생들과 용인·성남 지역 대학생들은 끊임없이 반독재 활동과 시위를 이어가고 있었으며, 공단에는 노동자의 인권과 생존권을 위해 노동조합을 설립하는 등 노동 운동 그룹이 형성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또한 주민교회 이해학 목사를 비롯한 재야 인사들의 적극적인 반독재 투쟁이 있었다. 이러한 반독재민주 세력은 주민교회를 중심으로 성남지역민주사회발전연구회를 구성하였으며, 1986년 12월 성남지역 해고노동자들에 대한 성남경찰서의 불법 연행과 고문 수사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또 긴급히 고문폭력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진상조사 활동과 규탄 집회를 개최하는 등 연대 활동을 하였다.
[목적]
6월 항쟁 은 전두환 정권의 4·13 호헌 조치에 반대해 직선제 개헌을 쟁취하여 국민들의 손으로 직접 대통령을 선출해 군부 독재 정권을 종식시키고 민주 정부를 수립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발단]
군부 정권의 강도 높은 탄압은 결국 1987년 2월 서울대학교에 재학중이던 박종철 학생을 고문으로 사망시키기에 이른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은폐하려는 정권의 음모가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 의해 드러나게 되면서 국민들의 분노는 한층 높아졌으며, 군부 독재 정권의 장기 집권을 위한 4·13 호헌 발표는 6월 민주화 항쟁의 직접적 계기가 됐다.
1987년 3월 17일, 성남 지역에서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이끌고 있던 성남지역민주사회발전연구회가 그 동안의 축적된 경험과 활동을 평가하면서 지역 민주 인사들과 함께 학생·노동자·빈민 등 각 부문 조직을 근간으로 성남민주화연합으로 개편되었다.
성남민주화연합은 명실상부한 민주화 운동 단체들의 연합체로서 활동하다가 같은 해 5월 성남 지역의 민주화 투쟁을 주도하기 위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성남지역본부를 새롭게 결성하고 6월 항쟁을 주도하였다.
[경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성남지역본부는 전국적 흐름에 맞춰 6월 10일 고문 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시민 대회를 개최하기로 하고 수천 장의 유인물을 제작하여 성남 시내 곳곳에 배포하며 집회를 준비하였다.
6월 10일 경찰들의 삼엄한 봉쇄에도 불구하고 중앙시장 4거리를 시작으로 종합시장·성호시장 등지에서 3천여 명이 참여하여 시위를 벌였다. 그 후에도 매일성남시청과 종합시장·성호시장·중앙시장·상대원시장·상대원공단을 오가면서 시위를 이어갔다.
성남에서의 6월 항쟁은 주민교회를 비롯한 개신교 신자들의 기도회를 비롯해 6월 18일 최루탄 추방 대회에 이어 6월 항쟁 중 가장 많은 5만여 명의 시민이 시위에 참가했던 6월 26일 민주헌법쟁취대행진에 이르기까지 시위를 계속하며 4·13 호헌 조치 철폐·직선제 개헌 쟁취·독재 정권 타도 등 반독재 민주화를 요구하였다.
[결과]
6월 10일부터 벌어진 20여 일 동안의 범국민적 항쟁은 결국 위기 의식을 느낀 전두환 정권이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한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의 직선제 개헌과 평화적 정부 이양·「대통령선거법」 개정·김대중의 사면 복권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6·29 선언을 발표하면서 일단락되었다. 이러한 직선제 개헌에 따라 1987년 직선제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의의와 평가]
성남은 1971년 8월 10일의 광주대단지 사건과 더불어 탄생한 도시로서,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다시 한번 지역의 공동체적 유대감과 정치 학습 효과를 거두어 향후 성남 지역의 모든 운동의 역사적 기반이 되었다.
노동계는 1989년에 한국노동조합총연합 성남시협의회와 성남노동조합협의회가 중앙으로부터의 부담을 이겨내고 하나의 지역 노동자 단체를 건설하게 되고 학생들을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산하의 용인성남지역 총학생회협의회를 건설하면서 조직적인 학생운동을 펼쳐나가게 된다. 또한 6월 항쟁은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성남의 시민 사회를 등장시키는 계기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