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30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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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漢山城 |
영어공식명칭 | Namhansanseo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은행동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손수연 |
조성|건립 시기/일시 | 672년(문무왕 12) - 발굴조사 결과 8세기 중반에 조성된 성벽과 건물 터 등이 확인되어, 672년(문무왕 12) 축조한 신라 주장성(晝長城)의 옛터였을 것으로 추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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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건립 시기/일시 | 1626년(인조 4) - 1621년(광해군 13) 옛터에 남한산성을 축조하고 1624년(인조 2)에 남한산성 원성을 개축하여 2년 뒤 완공 |
훼손 시기/일시 | 1636년(인조 14) - 병자호란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638년(인조 16) - 병자호란(1636)을 겪고 2년 뒤 남한산성 원성을 증·개축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686년(숙종 12) - 외성 한봉성을 신축하였고, 19년 뒤 청인에 의해 철거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711년(숙종 37) - 좌전, 우실 증설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719년(숙종 45) - 외성 신남성(남격대) 신축 |
훼손 시기/일시 | 1910년~1945년 - 일제 강점기 행궁 훼손 |
훼손 시기/일시 | 1950년 - 6.25전쟁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54년 - 남한산성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1963년 - 남한산성 경기도 광주시 사적 제 57호 지정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71년 - 남한산성 도립공원으로 지정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76년 - 남한산성관리사무소 개소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85년|2004년 - 한양대학교박물관에서 남한산성 지표조사 실시(1985), 행궁권역 내 건축물 이축지 시·발굴 조사 실시(2004)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98년~2001년 -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광주시에서 남한산성 종합지표조사 실시(1998). 남한산성 및 행궁지 시·발굴조사 실시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5년 - 중원문화재연구원에서 성곽 암문, 수구지 일대 발굴조사 실시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10년~2018년 - 경기문화재연구원에서 남한산성 폐사지, 군포지(2018) 시굴조사 실시|한흥사지(2010~2012), 남옹성(2014), 수구문(2015), 국청사지(2017) 등 발굴조사 실시 |
문화재 지정 일시 | 2014년 - 남한산성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 |
문화재 지정 일시 | 2015년 - 신남성을 사적으로 추가 지정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15년 - 한강문화재연구원에서 남한산성 외성 봉암성 수구권역 발굴조사 실시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18년|2020년 - 한라문화재연구원에서 남한산성 연무관·이아지유적 발굴조사 실시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20년 - 서울문화유산연구원에서 남한산성 15암문 발굴조사 실시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20년 - 한성문화재연구원에서 남한산성 외성 신남성, 수구 24·25 발굴조사 실시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20년 - 한백문화재연구원에서 남한산성 행궁권역 발굴조사 실시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21년 - 한국문화유산연구원에서 남한산성 북문 발굴조사 실시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22년 - 경강문화재연구원에서 남한산성 북문 발굴조사 실시 |
현 소재지 | 남한산성 -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은행동 |
원소재지 | 남한산성 -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은행동 |
성격 | 산성 |
관련 인물 | 유성룡|인조|숙종 |
크기(높이,길이,둘레) | 성곽 길이 12,356 m |
면적 | 세계유산구역과 완충지역을 포함한 전체면적 12,626,742 ㎡ 중 성남시에 속하는 면적 961,222 ㎡[8%]|남한산성도립공원 면적 35.16㎢ 중 성남시에 속하는 면적 4.79㎢[14%] |
문화재 지정 번호 | 사적 |
[정의]
조선 시대 수도 한양을 지키던 성곽으로 성남시, 광주시, 하남시에 걸쳐 있는 남한산의 산성.
[개설]
남한산성은 신라 주장성(晝長城)의 옛터이자 고려 시대의 광주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조선 왕실의 보장처(保障處)로 유사시 도성의 기능을 수행했으며, 성내에 행궁을 설치하여 종묘와 사직을 옮길 수 있도록 했다. 1626년(인조 4) 공역이 완성되자 광주부의 읍치를 남한산성으로 옮겨 방어 체계를 강화했고, 1683년(숙종 6) 광주부윤을 유수로 승격시켜 행정과 군사를 함께 담당하게 하여, 성내 인구를 규모 있게 갖춘 산성도시로 발전했다.
1839~1866년에는 박해를 받은 천주교도들이 순교했던 곳으로, 절두산·새남터와 더불어 한국 천주교회의 순교지로 꼽힌다. 일제 강점기에는 항일운동의 근거지로 활용되어 행궁이 훼손되었다.
[건립 경위]
1593년(선조 26) 유성룡(柳成龍)[1542~1607]이 남한산성 수어책을 주장한 이후 수축 논의가 계속되어 왔으나 이괄의 난과 청의 군사적 위협으로 착수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1626년(인조 2)에 와서 남한산성 수축과 행궁 건립이 시작되었다.
[위치]
성남시에는 남한산성 남문 근방의 성벽이 위치하는데, 성벽을 따라 제 1남옹성 부근과 부속 방어시설인 신남성 부근까지를 포함한다. 성남시에서 갈 수 있는 남한산성 옛길은 남문길로, 수정구 위례동에서 출발하여 남문으로 진입하기에 앞서 불망비(不忘碑)가 있는데 조선 후기 문신 수어사 서명응, 부윤 홍익필, 이명중이 하나의 바위에 3기의 비 형태로 ‘백성을 사랑한 공적을 잊지 말라’는 뜻을 새겼다.
[형태]
성벽 안팎의 경사를 달리하여 적이 접근하기 어렵도록 바깥쪽의 경사를 급하게 하여 방어에 유리하도록 설계했다. 원성, 여장, 4개의 성문, 암문, 수구문과 수구, 옹성, 치, 장대, 포루, 군포 등의 시설이 설치되었다. 봉암성(蜂巖城), 한봉성(漢峰城), 신남성(新南城) 등 3개의 외성과 5개의 옹성은 함께 연결되어 견고한 방어망을 구축했다. 현재는 동·서·남문루와 장대(將臺)·돈대(墩臺)·보(堡)·누(壘)·암문·우물 등의 방어 시설과 관청, 군사 훈련 시설 등이 남아 있다.
[현황]
남한산성은 유적 보존·활용 사업이의 일환으로 5코스의 둘레길 외에도 4코스의 옛길을 복원하였다. 남한산성에 방문하면 문화유산 해설도 들을 수 있다. 봉화로의 일부 노선인 남한산성 옛길은 조선 후기 10대로 가운데 하나로 왕들의 능행(陵幸)길, 장터를 잇는 보부상길, 지방 선비들의 과거 길로 사용되었다. 현재 신남성에는 송신탑이 위치해 있고, 차량 이용을 위해 ‘홍예문(虹霓門)’을 신축했다.
[의의와 평가]
남한산성은 통일신라 시대에 축성된 주장성으로, 군수 물자를 저장하는 특수 창고를 설치한 중요한 거점 성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외성과 옹성을 갖춘 전형적인 산성으로 만들었기에 산성의 변화 과정과 기능을 이해하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성남시 인근의 제1남옹성[남포루]과 신남성은 성곽 축성술의 발달사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병자호란 이후 적의 화포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축조된 옹성은 원성과 상당히 달라진 축조 기법을 보여준다. 제1남옹성은 남한산성 옹성 5곳 중 유일하게 군사 지휘 시설인 장대를 설치한 곳으로 청과의 외교 문제로 헐어낸 제2·3남옹성과 달리 조축 당시의 원형이 잘 유지되어 있다. 신남성도 병자호란 이후 당시 청군이 점령하여 호준포와 홍이포를 포진시켜 성 안쪽을 공격했던 위치에 신축되었다. 신남성의 동·서돈대는 남한산성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축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