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3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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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平壤城 |
이칭/별칭 | 북한산군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지명/고지명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
집필자 | 김선주 |
변천 시기/일시 | 475년 - 백제 근초고왕이 고구려의 남평양성[북한산군]을 빼앗아 남한산에서 남평양성으로 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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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 시기/일시 | 556년 - 신라 진흥왕이 북한산주 창설 남평양성에서 북한산주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문무왕 - 북한산주를 한산주로 개칭했다가 다시 남한산주로 개칭 |
변천 시기/일시 | 751년 - 남한산주를 한주로 개칭 |
변천 시기/일시 | 755년 - 한주를 한양군으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940년 - 한주를 양주로 개편 |
비정 지역 | 남평양성 - 경기도 양주시 |
성격 | 고지명|성 |
관련 문헌 | 『삼국사기』|『고려사』 |
[정의]
경기도 양주 일대에 있던 고구려의 성이자 행정 구역.
[형성 및 변천]
백제 근초고왕 이전 시기 고구려는 경기도 양주시를 포함하는 한강 유역에 진출하기 위해 남평양성을 두었다. 그러나 근초고왕이 고구려를 공략하면서 북한산 일대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였으며, 남평양성은 백제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370년(근초고왕 25) 백제가 한성을 공략하면서 별도(別都)로서 남평양성을 두었다.
진흥왕대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이 성공하면서는 한주(漢州)를 설치하였는데, 남평양성도 여기에 속하게 되었다. 경덕왕 대에 이르러 한양군(漢陽郡)이라 하였으나, 825년(헌덕왕 17) 기록에 김범문이 평양에 도읍을 세우고자 북한산주를 공격하였는데, 여기서 평양은 고려의 양주를 일컫는다.
[위치 비정/행정 구역상의 구분]
남평양성은 지금의 북한산성 내에 있었던 중흥동고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관련 기록]
『삼국사기(三國史記)』[권37, 잡지6 지리4]를 살펴보면, 동명왕(東明王)의 셋째 아들 온조(溫祚)가 전한(前漢) 홍가(鴻嘉) 3년 계묘[BC 18]에 졸본부여(卒本扶餘)로부터 위례성(慰禮城)에 이르러 도읍을 세워 왕을 일컫고 389년을 지냈다고 전해진다. 13대 근초고왕에 이르러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을 빼앗아 한성에 도읍을 두고 105년을 지냈다.
『삼국사기』[권10, 신라본기10 헌덕왕 17년 정월]에는 825년 봄 정월에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金梵文)이 고달산(高達山) 도적 수신(壽神) 등 100여 명과 함께 반란을 꾀하여, 평양(平壤)에 도읍을 세우고자 하여 북한산주를 공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도독 총명(聰明)이 군사를 거느리고 그들을 붙잡아 죽였는데 여기서 평양은 고려의 양주이다. 고려 태조가 지은 장의사(庄義寺) 재문(齋文)에, “고려의 옛 땅이요, 평양의 명산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고려사』[권56 지리1 양광도 남경유수관 양주]에는 “남경유수관 양주(南京留守官楊州)는 원래 고구려의 북한산군(北漢山郡)[남평양성(南平壤城)이라고도 한다.]인데 백제의 근초고왕이 빼앗아서 370년(근초고왕 25)에 남한산(南漢山)으로부터 이곳으로 수도를 옮겼다. 474년(개로왕 20)에 신라 자비왕[장수왕의 오기]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한성(漢城)을 포위하므로 개로왕이 성을 벗어나 달아나다가 고구려 군사에게 살해당하였으며 이 해에 개로왕의 아들 문주왕이 수도를 웅진(熊津)으로 옮겼다. 그 후 신라 554년(진흥왕 15)에 북한산성(北漢山城)에 이르러 국경을 정하였고 556년(진흥왕 17)에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창설하여 군주(軍主)를 두었으며 755년(경덕왕 14)에 개편하여 한양군(漢陽郡)으로 만들었다. 고려 초에 다시 양주(楊州)로 고쳤다”고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