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3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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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迎曙驛 |
이칭/별칭 | 연서역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고려/고려,조선/조선 |
집필자 | 정학수 |
[정의]
고려부터 조선까지 경기도 양주에 설치된 교통·통신 기관.
[개설]
역(驛)은 고대 이래 중앙 정부와 지방간의 효율적인 연결망을 구축하기 위해 육로(陸路)에 설치한 교통·통신 조직의 일종으로 역참(驛站)이라고도 하였다. 영서역(迎曙驛)은 고려 시대에는 청교도(靑郊道)의 역 가운데 양주[남경] 지역에 있으면서 파주·교하·개경 등지를 연결하였고, 조선 시대에는 양주 치소에서 서쪽 60리[24㎞] 지점[현재의 서울특별시 은평구 불광동 33-40번지 일대와 대조동 49-24번지 일대]에 있으면서 우도정역(右道程驛) 찰방 내지 영서도(迎曙道) 찰방 관할의 중심 역으로서 서울과 관서(關西) 지방을 연결하는 대로역(大路驛)이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영서역은 다른 지역의 역들과 마찬가지로 국가가 지방 통치를 위한 정령(政令)의 전달 및 관리·군사 왕래의 임무뿐만 아니라 서울~의주의 사행로(使行路)에 위치한 까닭에 특히 외교 사행의 영송(迎送) 등의 임무가 원활히 수행되도록 하는 교통·통신 기구 역할을 하였다.
[관련 기록]
『고려사(高麗史)』[권82, 병지 참역(站驛)]에 “청교도는 15개 소를 관할한다. 청교(靑郊) 개성(開城), 통파(通波) 임진(臨津), 마산(馬山) 봉성(峯城), 벽지(碧池) 고봉(高峯), 영서(迎曙) 남경(南京), 평리(平理) 덕수(德水), 상림(橡林), 단조(丹棗) 적성(積城), 청파(淸波) 남경(南京), 노원(蘆原) 남경(南京), 행주역(幸州驛), 종승(從繩) 수안(守安), 금륜(金輪) 수주(樹州), 중림(重林) 인주(仁州), 녹양(綠楊) 견주(見州).”라 하였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태종실록(太宗實錄)』[26권, 13년 9월 1일]에 의정부에서 아뢰었다. “경기에서 의주(義州)까지의 각역(各驛)은 모두 사신(使臣)이 지나가는 곳입니다. 연서(延曙)에서 초현(招賢)까지, 서북면 생양(生陽)에서 의순(義順)까지 모두 역승(驛丞)이라 칭하는데, 오로지 금교(金郊)에서 풍해도 경천(敬天)까지를 찰방(察訪)이라 칭하니 미편합니다. 빌건대, 역승(驛丞)이라 칭하고 감사(監司)로 하여금 고찰하게 하소서.”고 하였다.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世宗實錄)』[30권, 7년 11월 3일]에 경기·충청도 정역찰방(程驛察訪) 이길배(李吉培)가 계하기를, “도에서 맡은 각역에, 외국 사신을 태워 나르는 일의 복잡함은 타도에 비해서 10배나 되는데, 병조에서 책정한 일수(日守)는, 대로(大路)에는 8명에 불과하고……” 병조에서 의논해 아뢰기를, “영서에서 산예(狻猊)까지의 각 역에는 예전 정원 8명에서 6명을 더 정하고……”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경기 양주도호부]에는 역이 6이니, 청파(靑坡)·노원(蘆原)·영서(迎曙)·평구(平丘)·구곡(仇谷)·쌍수(雙樹)라고 하였다.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61권, 12년 2월 15일]에 경기 관찰사 박원종(朴元宗)이 아뢰기를, “동서의 금표(禁標)를 이와 같이 한계를 물려서 정하게 되면, 영서역을 옮겨야 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영서역은 고부평(古富平)으로 옮기고, 강물을 끌어 올리는 일은 늦출 수 없으니, 수리 도감에 명하여 군정을 뽑아 급속히 파게 하라.” 하였다.
『선조실록(宣祖實錄)』[145권, 35년 1월 13일]에 헌부가 아뢰기를, … 양주목사(楊州牧使) 윤경(尹暻)은 연서(延曙)의 관사를 지을 때에 재목을 모두 백성들의 부담으로 거출하고서 들보로 사용할 큰 나무를 골라서 관판(棺板)을 만든 다음 서울로 실어 들였고, 그밖에 서까래 따위 등도 공역(功役)을 마치기도 전에 대부분 사사로이 써버리고는 막상 써야 할 때에 부족하자 또 민간에 책임을 지우니 백성들이 그 고통을 견디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루라도 관직에 있게 할 수 없으니, 파직을 명하소서. ……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선조실록』[194권, 38년 12월 28일]에 연서역(延曙驛)은 서로(西路)에 연접되어 있기 때문에 전부터 품계가 높고 명망이 있는 문관을 차임하여 보냈으니, 여기에는 반드시 의의가 있는 것이라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경기 양주목 역원]에 영서역은 주 서쪽 60리 지점에 있다. 찰방(察訪)의 본도인데, 속역이 여섯이다. 벽제(碧蹄)·마산(馬山)·동파(東坡)·청교(靑郊)·산예(狻猊)·중련(中連)이다. 찰방은 한 사람이다. 『여지도서(輿地圖書)』[경기도 양주목 역원(驛院) 부발참(附撥站)]에는 연서역은 서 10리 면에 있는데 남쪽으로 50리 떨어져 있고 서관직로(西關直路)의 두참이자 본역으로 말이 10필, 이속과 남자 종이 45명, 여자 종이 20명이라고 전한다.
[변천]
조선 시대 영서역 혹은 연서역은 한양에서 의주로 가는 서발(西撥)의 첫 번째 역이자 한양으로 들어오는 마지막 역이었다. 이 때문에 영서역은 중국 사신의 빈관(賓館)이나 왕의 행궁(行宮)으로 사용되기도 하여 조정에서는 국초부터 중시하였다. 1425년(세종 7)에는 외국 사신의 행차가 많은 경기·충청의 역원 정원을 늘려 주었는데, 특히 시신 행차가 빈번한 영서에서 개성의 산예까지의 각 역에는 예전 정원 8명에서 6명을 더 정하여 부담을 줄여 주었다.
1431년(세종 13)에는 찰방과 역리들의 사무와 부담을 덜기 위해 경기 정역찰방 한 명을 증원하고 그 관할 범위를 둘로 나누어, 영서역~산예역은 경기우도 정역찰방에, 양재역~무극역은 경기좌도·충청도 정역찰방에 속하게 하였다. 본래 영서역은 현재의 서울특별시 은평구 불광동 33-40번지 일대에 있었는데, 연산군 때 영서역이 서쪽 금표(禁標) 안에 들게 되어 역을 부평(富平)으로 옮겼다가 중종이 즉위한 후 대조동 49-24번지 일대에 다시 옮겨 지은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영서역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파괴되어 다시 지었는데, 이때 양주목사 윤경이 공사를 진행하면서 재목을 백성들 부담으로 지우거나 서까래 등을 사사로이 썼다 하여 파직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에 영서역은 주로 연서역으로 불리면서 관서[평안도] 직로의 두참이자 본역으로 기능하였다. 영서도의 중심 역인 영서역은 다른 지역의 역들과 마찬가지로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까지 존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