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4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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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莘川場 |
이칭/별칭 | 북도천장,화천장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지명/시설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봉양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
집필자 | 홍정덕 |
제정 시기/일시 | 1800년대 초반 - 신천장 개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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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 시기/일시 | 1800년대 초반 - 화천장은 1·6일장 |
변천 시기/일시 | 1800년대 중반 - 북도천장은 1·6일장 |
변천 시기/일시 | 1800년대 후반 - 화천장은 2·7일장 |
폐지 시기/일시 | 1900년대 초반 - 동두천장으로 흡수되어 신천장 소멸 |
비정 지역 | 신천장 - 경기도 양주시 봉양동 |
성격 | 장시 |
관련 문헌 | 『경기지』|『여도비지』|『양주군지』 |
[정의]
조선 후기부터 근대까지 경기도 양주시 봉양동 일대에서 열렸던 정기 시장.
[명칭 유래]
신천장(莘川場)은 양주를 관통하는 신천(莘川)에서 유래되었다. 신천은 양주군 남면 신산리(莘山里)에서 발원하여 남행하다가 회천에서 ㄱ자 형으로 돌아 북쪽으로 흘러가다 동두천 시내를 관통하여 한탄강에 합류하는 하천이다. 본래 동두천 지역의 신천은 삼국 시대부터 모래내, 즉 사천(沙川)으로 불렸고 현재의 정식 이름은 강화천(江華川)인데 양주 지역의 하천명인 신천이 항간에서 그대로 불리며 속칭으로 정착되어 현재에 이른다. 신천을 북도천(北道川)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이유는 이 하천이 북류하기 때문이다.
신천장의 또 다른 명칭인 북도천장(北道川場)은 하천명에서 비롯되었고, 화천장(華川場)이라는 또 다른 이름은 하천의 정식 이름인 강화천에서 나왔거나 신천장을 필사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로 보인다.
[형성 및 변천]
신천장은 삼방로에 있는 교통의 요지로 장시가 형성될 만한 지리적 이점을 가진 회천읍 봉양리 지역에 형성되었다. 이곳은 양주 지역을 관류해 온 신천이 흐름을 바꾸어 북류하며 강화천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는 시작 지점이자, 임진나루를 건너온 삼방로의 동두천과 덕계의 중간 지점으로 남북 방향 양쪽의 물산이 모이는 곳이었다.
『양주읍지(楊州邑誌)』에 따르면 신천장은 어등산면(於登山面)에서 열렸다고 한다. 어등산면의 위치는 『대동지지(大東地志)』에 따르면 현재의 양주시 봉양동이다. 의정부(議情阜)~비선거리[碑立巨里][4㎞, 갈림길 分岐]~어등산(漁登山)[8㎞]~가정자(柯亭子)[8㎞]~한탄나루(大灘津)[8㎞]~가사평(袈裟坪)[4㎞]~통현(通峴)[4㎞]~연천(漣川)[4㎞, 갈림길 서울에서부터 56㎞]이라는 노정표를 살펴보면 현재의 양주시 남방동인 비선거리에서 8㎞를 지나고 동두천시 봉암동인 가정자까지의 거리가 8㎞라고 한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신천장은 『경기지(京畿誌)』, 『경기읍지(京畿邑誌)』, 『양주군지(楊州郡誌)』에는 화천장으로, 『여도비지(輿圖備志)』에는 북도천장으로 기록되어 있고, 장날은 1·6장 또는 2·7장으로 되어 있다. 신천장은 조선 말 이후 자료에는 나타나지 않는데, 이는 경원선 동두천역이 생기면서 동두천장이 활성화되는 대신에 동두천장과 인접한 신천장은 동두천장에 합쳐지는 형태로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위치 비정/행정 구역상의 구분]
신천장은 경기도 양주시 봉양동 일대로 비정된다.
[관련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