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430 |
---|---|
한자 | 驛屯土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조선/조선,근대/개항기 |
집필자 | 이도남 |
[정의]
조선 시대 경기도 양주 지역의 역(驛)과 관청에 지급된 토지.
[개설]
교통의 중심지에 설치된 역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지급된 전답을 역토(驛土), 지방이나 중앙 관청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각 관청에 지급된 토지를 관둔전(官屯田)이라 하며 이를 합하여 역둔토(驛屯土)라 한다. 『양주정간책(楊州井間冊)』에 의하면 조선 시대 양주에는 6개의 역토와 14개의 둔토(屯土)가 있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양주 지역에 설치된 역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역토를 지급하였으며, 관청에 필요한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둔토를 지급하였다.
[관련 기록]
「경기 각 군역 둔전답 일경 두락 결복 정도 실수 도안(京畿各郡驛屯田畓日耕斗落結卜定賭實數都案)」[규 19178]과 「양주군 각 역 도조 실수 급 각 둔 기경 양년 조납 미납 구별 병시직 성책(楊州郡各驛賭租實數及各屯己庚兩年租納未納區別幷時直成冊)」, 『경리원가고건(經理院可考件)』[규 22052]을 살펴보면 양주의 역둔토에 대한 실태를 알 수 있다.
[내용]
역둔토는 역의 경비를 충당하는 역토와 역에 주둔하는 군대가 자급자족을 위하여 경작하는 둔전(屯田)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역토는 역참에 부속된 토지로, 역의 일반 경비와 소속 이원(吏員)의 봉급 및 말을 양육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마련할 수 있도록 일정한 부속지가 설정되어 있었다. 여기에는 관리의 숙박에 소요되는 경비를 충당하는 공수전(公須田), 행정에 쓰이는 지전(紙田), 역장의 수당에 충당하는 장전(長田) 등이 있다. 양주군에는 영서역(迎曙驛), 쌍수역(雙樹驛), 평구역(平邱驛), 벽제역(碧蹄驛), 녹양역(綠楊驛), 구곡역(仇谷驛)의 6개 역이 존재하였으며, 각 역마다 역토가 지급되어 경비를 충당하였다.
한편 둔토는 둔전으로서, 중앙 및 지방의 각 병영과 행정 관청의 군수 및 경비를 충당하도록 설정된 토지이며 방벌군(防伐軍)이나 인근 농민·노비 등에 의하여 경작되었고, 대부분 지주 소작제에 의거하여 경영되었다. 둔전은 원래 변경(邊境)이나 군사 요지에 설치하여 군량을 충당하는 의미의 국둔전(國屯田)이었으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새롭게 나타난 영문둔전(營門屯田)[군문둔전이라고도 함]과 아문둔전(衙門屯田)은 관청의 경비를 보충하는 관둔전(官屯田)의 성격이 강하였으며, 주로 중앙의 관청에서 설치하였다. 1427년(세종 8) 각 지방 관청에 지급된 관둔전은 수령의 등급에 따라 목관(牧官)은 10결이었으므로 양주목도 10결의 관둔전이 지급되었다.
[변천]
각 관청이 경비 부족을 호소하자 1457년(세조 3)에 지급 결수를 증가시켜 양주목에 20결을 지급하였다. 그런데 조선 후기 5군영(五軍營)이 설립되면서 각 군영은 군자(軍資)를 확보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둔전을 설치하였다. 이에 따라 둔전은 지방 관청뿐만 아니라 5군영 이외의 중앙 관청에 의해서도 설치되었다.
대한제국 시기 양주에는 향둔(餉屯), 경둔(經屯), 총둔(摠屯), 훈둔(勳屯), 용둔(龍屯), 관둔(官屯), 아차산(峨嵯山), 낙천정(樂天亭), 장흥산(長興山), 천보산(天寶山), 해등촌산(海等村山), 벌리산(伐里山), 상하가오리(上下加五里) 등 14개의 둔토를 두어 관청 경비에 충당하였다. 역둔토는 1894년(고종 31) 8월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의 의안(議案)에 의해 모두 출세지로 변경되었다. 그 후 1895~1896년 역둔토 조사 사업을 통하여 폐지되었으며, 1900년 내장원(內藏院)에 귀속되었다.
[의의와 평가]
조선 후기로 내려오면서 역둔토는 경작 농민의 자유로운 성장과 더불어 개별적인 사유지, 즉 민전(民田)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1905년 통감부(統監府)의 설치와 함께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국유지 정리 사업이 주도되면서 1908년 역둔토 관리 규정을 반포, 여러 기관에서 관리하던 역토와 둔토, 궁방 소속의 토지와 국유지를 통틀어 역둔토로 정리되었으며, 조선 총독부 소속 토지로 소유권을 이전하여 광대한 민전을 약탈하였다. 양주의 역둔토 또한 일제에 의해 강탈되었으며, 결국 일제 강점기 조선에 대한 일제의 경제적 약탈을 위한 밑바탕을 만드는 데 양주의 역둔토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